상단영역

본문영역

오래 오래 괜찮은 인생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입력 : 2013.06.18 19:20
  • 기자명 By. 충청신문
▲ 이 정 희 시인·둥그레 시 동인 회장

나는 지금 오래 오래 괜찮은 삶의 일대기를 엮는 중이다. 거북이처럼 달팽이처럼 속도를 끌면서 가도 보람은 있다. 특출하게 이룬 건 없어도 더디 가는 속에서 느린 만큼 빨라지는 묘수를 본다. 빠른 게 전부일 수 없는 인생의 스케치다.

청국장이 뚝배기에서 바글바글 끓는다. 밥상에 올려놓은 게 10분 남짓이고 식사도 어지간히 끝낸 중인데 여전히 끓고 있다. 오래 끓으면서 식탁을 덥혀 주는 특유의 온기가 떠오른다.

끓을 때는 더디 가는 삶이 그려진다. 급하다고 가스를 올려 봐야 기본으로 달궈지는 시간이 필요한지 가장자리가 탈 뿐이고 소정의 시간을 채우고서야 끓는다.

아차 싶어 도중에 줄이곤 하는데 어쩌다 고온으로 끓이다 보면 건더기가 익지 않아 설컹설컹하다. 바글바글 끓은 맛 같지 않고 화덕 내 때문에 맛이 덜하다.

서둘러도 맞장구를 치지 않고 훈계나 하듯 뜸을 들이고서야 비로소 끓는다.

두껍고 투박해서 졸이거나 찜을 할 때 적당하다. 예외로 살짝 데쳐야 좋은 시금치와 건성 익어야 좋은 콩나물은 얇은 냄비가 제격이나 기왕이면 두꺼운 게 낫다. 질그릇도 오랜 날 만들어졌다.

원하는 모양을 만든 후 초벌구이를 하고 그 다음 유약을 발라 재벌구이에 들어간다. 초벌구이를 한 뒤에도 그늘에서 여러 날 말린다.

뚝배기보다는 된장 맛이라는 말도 천천히 오래 끓는 습성에서 파생된 노하우다.

바글바글 끓어나는 뚝배기는 옮길 때도 편하다. 스테인레스는 너무 뜨거워서 잠깐 식혀야 되지만 뚝배기는 끓어날 때 옮겨도 과히 뜨거운 걸 모른다.

천천히 오래 달궈진 그릇이라 뜨겁기는 해도 손을 델 정도는 아니다. 쉽게 뜨거워진 그릇은 금방 식고 자칫 데기도 한다. 빠르기에 중독된 현대인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오래 끓는다는 게 천천히 데워지는 거라면 질그릇처럼 오래 뜨거운 사람이고 싶다. 누군가를 사귈 때도 오래 오래 변함이 없는 정을 나누고 싶다.

쉽게 뜨거워진 방은 빨리 식는다. 금방 뜨거워지다 보면 데기도 하련만 은근한 사랑은 시답지 않게 여긴다.

빨리 더워지지 않으면 사랑이 없다고 여기는지 금방 헤어지는 경향이다. 잠깐 보고 말 것도 아닌데 뭘 그리 한꺼번에 요구하는지 모르겠다.

그런 사랑은 시효가 짧다. 은근한 불에 일군 누룽지는 아무리 두어도 타지 않는다. 타기는커녕 더욱 두껍게 눌어붙어 한결 구수하다. 온기는 괜찮으나 지나친 열기는 밥을 태우고 냉골 내까지 풍긴다. 진솔한 정 때문에도 천천히 뜨거워져야 맞다.

질그릇이 여타 요리에 적정하나 된장찌개가 유독 맛있는 것도 딴에는 특이하다. 된장 역시 오랜 날을 두고 만들어진 발효식품이었다. 그렇게 만든 것을 두 번 세 번 구워 만든 뚝배기에 안치고 특별히 약한 불에 끓인 된장찌개에서 빠른 것만이 능사가 아닌 세상을 다시금 본다.

장작은 오래 탄다. 옮겨 붙을 때까지 기다리다 보면 눈이 뻑뻑하고 눈물이 나지만 붙기만 하면 오래 간다. 검불과 삭정이는 후르르 타는 버릇이되 은근히 타면서 위력을 발휘하는 셈이다.

초등학교 시절, 엄마가 장작에 불을 붙이고는 한갓지게 청소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불을 붙이기가 힘들어도 한나절 이상 타는 장작불이 으뜸이다.

삭정이와 검불 같은 사람을 무시하기보다는 불을 달릴 때 오래 걸린다고 불평할 게 아니라는 의미다. 검불과 삭정이가 불이 붙자마자 금방 꺼지는 건 속히 자란 탓이다.

여름내 자랐어도 서리 한방에 죽는 건 땔감으로도 적당치 않다. 오래 타는 장작의 위력은 오래 자란 통나무에서 나왔으며 연륜도 오래 되었다.

장작은 불기를 조절하기가 쉽다. 어릴 적 엄마가 밥을 하시면서 뜸을 들일 때 보면 처음부터 장작을 지피다가 꺼뜨리셨다.

삭정이로 뜸을 들이면 왈칵 타올라 태우게 되고 기세에 놀라 물을 끼얹으면 완전히 꺼지지만 시나브로 타는 장작은 설익거나 하지 않는다.

우리 꿈도 조급히 굴다가 무산되기 일쑤라면 절제가 필요하다. 서두르다 보면 검불로 뜸 뜰이다가 태우는 것 같은 결과가 된다. 타다가 꺼지는 게 불의 한계고 추구하는 꿈도 헛되이 끝날 수 있으나 물을 끼얹으면서 뜸 들이는 강점을 이용하면 최소화된다.

지름길은 가끔 허탕을 칠 수 있으련만 고속도 모자라 초고속을 원하고 우회도로 아닌 고속도로에서 쾌감을 느낀다.

허둥지둥 달려간 후에는 돌아오는 일에 더 골몰한다. 소비된 시간은 똑같은데 물색없이 서두른다. 우물에서 숭늉 찾는 버릇과 돌다리도 두드려보는 차이다.

빨리 갈 때는 지치기 쉬우므로 마침표를 찍을 수밖에 없다. 다시 달리려면 준비운동이 필요하지만 천천히 가는 사람은 제자리걸음 상태라서 언제든지 달릴 수 있다. 한꺼번에 와짝 타는 것도 좋지만 느리게 오래 타는 인생은 훨씬 여유롭다.

내 삶의 악보에 적힌 빠르기표를 점검해 본다. 가장 멋진 빠르기는 속히 갈 수 있는데도 한 걸음 뒤처지는 여유와 급할수록 돌아가는 자세고 그것은 안단테 악보로써만 가능하다.

뭔가가 속히 된다면 검불처럼 재티만 날릴 수 있다. 은근히 뜸 드는 장작불이 안전하듯 천천히 완성되는 게 진짜다. 진정한 속도의 안배는 느리기에서 붙는 가속이다.

서두른 만큼 뒤처진다면 적정한 빠르기가 오래 오래 괜찮은 삶을 만든다. 천천히 가는 습관이야말로 빠르기에 중독된 현대인의 최고 처방전이다.

 

저작권자 © 충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충청신문기사 더보기

하단영역

매체정보

  • 대전광역시 중구 동서대로 1337(용두동, 서현빌딩 7층)
  • 대표전화 : 042) 252-0100
  • 팩스 : 042) 533-7473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황천규
  • 법인명 : 충청신문
  • 제호 : 충청신문
  • 등록번호 : 대전 가 00006
  • 등록일 : 2005-08-23
  • 발행·편집인 : 이경주
  • 사장 : 김충헌
  • 「열린보도원칙」충청신문은 독자와 취재원 등 뉴스이용자의 권리 보장을 위해 반론이나 정정보도, 추후보도를 요청할 수 있는 창구를 열어두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고충처리인 : 노경래 (042-255-2580 / nogol69@dailycc.net)
  • Copyright © 2024 충청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dailycc@dailycc.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