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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와 에어컨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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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3.07.16 19:35
  • 기자명 By. 충청신문

엊그제 모 행사에 갔다가 부채를 선물로 받았다. 한국전력에서 보내 온 것으로, 에어컨 등 전기제품의 수요가 늘고 수급에 차질이 생기면서 짐짓 이용하자는 의도인 성 싶었다.

지구온난화로 더위가 심해진 까닭이나 지나친 사용으로 공급에 차질이 생기는 걸 보면 무조건 틀어대는 건 삼가야겠다. 전기가 없을 때도 나름대로 더위를 식히던 옛사람들의 운치가 아쉽다.

열기를 식히는 최고의 수단은 아무래도 에어컨이라 할 것이되 옛날에도 그런 도구는 많았다. 대나무로 사람의 형상을 본떠서 만든 죽부인이 있었고 등나무 줄기로 엮은, 땀이 배지 않도록 속옷 밑에 받쳐 입는 등등거리도 있다.

더운 게 이유라 해도 껴안고 자는 것 때문에 죽부인이라고 별호를 지어 부른 것부터가 해학적이고 통풍구 역할을 했던 등등거리 역시 이름만 들어도 시원한 느낌이다.

정약용의‘소서팔사(消暑八事)’에는 말 그대로 여덟 가지 피서법이 나온다. 느티나무 그늘에서 그네타기, 솔밭에서 활쏘기 빈 누각에서 투호놀이 하기와 대자리 깔고 바둑 두기와 연꽃 구경하기, 비오는 날 시를 짓고 달밤에 탁족하는 것과 숲 속에서 매미소리를 듣는 것이다.

솔밭에서 활을 쏘고 그네를 타는 건 생소하나 대자리 깔고 바둑을 두고 연꽃 구경과 비 오는 날 시 짓는 것은 웬만치 가능할 것이다.

그 외에 달 밝은 밤 냇물에 발을 담그고 숲속에서 매미 소리 듣는 것은 더워지기 무섭게 텐트를 챙겨 휴가를 떠나는 것보다 제법 운치 높은 피서법이다.

선풍기와 에어컨으로 견디다가 복더위가 시작되는 8월, 계곡에 발을 담그고 해수욕을 하면서 땀을 식히는 것도 소서팔사 식이라 하겠으나 곳곳에 쌓이는 쓰레기를 보면 심각한 문제다.

잠시 잠깐 일상에서 벗어나 더위를 식히고 마음을 가라앉히는 차원이 아닌 이따금 흥청망청 즐기는 식이다 보니 아름다운 자연이 얼핏 유흥장으로 바뀐 듯한 기분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조상들의 피서법은 꽤나 합리적이었다. 대청마루에 화문석을 깔고 앉아 부채질을 하면서 땀을 식히는 모습도 오래 전 풍경처럼 다가온다. 왕골로 만든 화문석의 깔깔한 질감도 시원한 느낌이다. 꽃무늬 돗자리 위에서 더위를 잊는 정경과 골짜기 혹은 개울가에서 쥘부채 여백마다 산수화를 그려 넣으며 더위를 피하는 것도 잊지 못할 향수다.

전기 공급에 차질이 생기도록 에어컨을 쓰는 것이나 환경이 오염될 지경으로 무리하는 피서법보다 얼마나 여유로운가.

우물에 과일을 채웠다가 먹는 방법도 특이했다. 두레박에 매달아 우물 깊숙이 넣었다가 해거름에 꺼내 먹는 맛은 냉장고에 저장해 둔 것과는 천양지차다. 어느 날은 김치통이 담겨 내려가기도 하는데 냉장고가 생활필수품이 된 지금과는 달리 원시적이기는 해도 정감이 묻어난다.

하나가 무조건 전기제품에만 의지한 것에 비해 우물에 채우는 방식은 스스로 이기고자 하는 소박한 지혜가 돋보인다. 특유의 과일 맛도 그대로 살아 있거니와 더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자세 또한 인상적이다.

그렇게 해도 더위를 이길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삼복더위가 시작되면 가만히 있어도 땀이 나고 부채를 비롯한 도구가 무색해지지만 중요한 것은 마음을 식히는 일이다. 마음을 식히지 않고서는 그럴싸한 피서법도 무의미하려니와 마음을 식히면 그늘 아닌 데서도 견딜 수 있고 그로써 등장한 게 한증이다.

등등거리를 입고 부채질을 하면서 죽부인을 끼고 자도 더운 한여름 도저히 역부족인 걸 알고는 뒤뜰 혹은 가까운 산에 토굴을 파고 그 속에서 뜨거운 열기로 제어하려는 최고의 피서법이다.

견디다 못해 가장 나중에 택한 방법일 테지만 열기를 다스리는 건 열기라는 지혜를 자연스럽게 터득하는 예화다. 요즈음의 피서법이 단순히 더위를 물리치려 한다면 그 방법은 더위를 통해 정신적 수양을 쌓으려는 자세가 드러난다. 피서법도 격을 따지기보다는 마음을 식히는 게 우선이라는 본체를 정확히 꿰뚫었다. 갈등이 남아 있으면 부채질을 하고 선풍기를 틀어대 봐야 의미가 없다.

우리 과연 무엇 때문에 더운 것인가. 더위를 이기기 위해 다들 전전긍긍이지만 그럴수록 당연히 여기고 가라앉히는 여유가 필요하다.

최근 여름이 급격하게 더워지는 것도 선풍기와 에어컨만 쓰다 보니 냉각시키기 위한 열기로 기온이 올라간 탓이다. 나처럼 더위를 잘 견디는 입장에서 할 수 있는 말이고 열이 많은 사람은 고역일지 모르나 덥지 않으면 노폐물이 빠져나가지 못하고 온갖 병을 유발하기 때문에 지혜로운 극복이 필요하다.

여름에 찜질이 좋은 건 한증에서도 드러난다. 축적된 몸의 찌꺼기는 복더위로도 빠져나가지 않아 토굴까지 만들어 달군 후 한증을 했었다. 겨울 또한 따스하면 해충이 죽지 않고 살아 더 많은 알을 슬게 되고 그로써 온갖 병벌레에 시달린다.

그런데도 춥다고 혹은 덥다고만 하면서 속을 끓인다. 춥고 더운 날씨를 부채질하고 부추기는 건 혼자 끓이는 우리들 속내라는 거다.

마음을 식히지 않으면 결코 시원해질 수 없음을 이 여름에 특별히 배운다. 더위보다 마음을 먼저 다스려야 한다는 것을 해마다 숙지하는 셈이다.

이 정 희 시인·둥그레 시 동인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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