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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장 예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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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3.08.06 18:56
  • 기자명 By. 충청신문

여름이면 배탈이 자주 난다. 남들처럼 더워서 고생을 하지 않는 대신 소화가 되지 않고 그럴 때마다 고추장이 입에 당긴다.

반찬을 하고 간을 볼 때 찍어 먹는 정도지만 거북했던 속이 거짓말처럼 가라앉는 걸 보면 생각이 많다.

그 즈음 음식을 할 때도 고춧가루 대신 고추장을 많이 넣게 된다. 1 년 내 묵어 그런지 이상하게 제 빛깔을 내지 못한다. 늙은 오이를 무칠 때도 고추장을 쓴다. 고춧가루는 멀뚱하기만 해서 빛깔도 나지 않고 우선은 상큼한 맛이 덜하다.

김치를 담글 때도 붉어진 햇고추를 다져 넣지 않으면 빛깔이 시원찮다. 양념간장에도 붉어진 녀석 한 두 개라도 다져 넣어야지 묵은 고춧가루는 새까만 간장과 겉돌기만 한다.

무더위에 지칠 즈음이면 웬만한 자극에는 둔감해져서 고추장이라도 넣어야 먹기가 그나마 수월한 걸까. 그 무렵 해 먹는 장떡만 해도 고추장이 들어가야 맛나다. 풋고추와 미나리와 호박과 부추가 들어가는 건 여느 때와 같고 다만 고추장 한 숟갈이 추가되는데 그게 바로 장떡이다.

장마철이면 숲속의 방죽도 장떡 한장 굽는다. 장떡이라 해도 어쩌면 고추장을 그리 알맞게 풀었는지 너무 빨갛지도 않고 적당히 불그름한 게 제법 먹음직스럽다.

온 천지가 물바다로 바뀔 때마다 천연스레 장떡 한 장 굽던 방죽이 올해도 예외 없이 그랬다. 장대비가 쏟아진 후 제방이 무너지고 논둑이 터졌다는 소식에 가 보니 그득 담긴 황토물이 천연 고추장을 푼 꼴이었다.

산사태로 방죽 가상이에 떠내려 온 물풀과 검부러기가 가지런히 채 썬 풋고추와 호박을 닮았고 물때마냥 엉긴 모양새도 번철 귀퉁이에 남아 있는 기름 찌꺼기와 흡사했다.

비가 올 때마다 서너 소댕은 너끈히 구워대는 숲 속 어름의 풍경이 떠오른다. 무쇠 솥 뚜껑을 뒤집어 굽던 옛날처럼 땡볕에 익고 후끈한 열기와 땅기운에 짜글짜글 노릇노릇해진다.

누가 뜯어먹었는지도 모르게 시나브로 없어질 즈음에는 장마가 끝나고 거짓말처럼 맑은 물이 담겼다. 며칠 빤하다가 여름도 끝물에 접어들면 다시금 장떡이 생각났다.

초가을에도 소나기 둬 줄금 퍼붓고 나면 제대로 익은 장떡이 또 방죽을 뒤덮었다. 여름 중에서도 요즈음같이 푹푹 찌는 복더위에는 부침개도 고추장을 풀어야 맛이 제대로 난다는 게 자못 특이했다.

부침개는 애당초 날궂이라 하여 비 오는 날 먹는 음식이다. 봄가을에도 부쳐 먹지만 비 오는 날의 그 맛이 아니다. 봄에 특히 바람이라도 부는 날은 딱딱해서 먹기가 거북하다. 반죽이 질거나 되직한 차이가 아닌 건조하고 습기 찬 날씨의 차이다.

장마철과 함께 눅눅해져야 본래의 맛이 나오는 걸 보면 날씨를 타는 특유의 속성이 느껴지곤 한다.

하지만 무더울 때는 반죽도 마땅치 않다. 무더위라 그런지 천둥천둥 늘어지기만 하고 걸핏하면 찢어지기 일쑤다. 소댕을 뒤집을 때도 바싹 구워지는 기색이 없고 처지는 게 일인데 고추장을 풀면 앙바틈하게 오그라들고 훨씬 맛깔스럽다.

요즈음 들어 고와지는 고추장의 특징이 그려진다. 이따금 소나기가 뿌리는 것 말고는 볕이 쨍쨍한 8월 초의 고추장 색깔은 참으로 곱다. 놀빛처럼 혹은 꼭두서니 빛처럼 발갛게 물드는 걸 보면 처음 담글 때의 빛깔 그대로다.

며칠 간 비가 올 때는 곰팡이가 허옇게 끼는 등 속을 썩이다가도 염소 뿔도 녹일 것 같은 복더위 햇살에는 구워지기나 하는 것처럼 빛깔이 살아나서 보는 것만으로도 입맛이 돌곤 하였다.

엊그제 고추 농사를 짓는 집에 다녀왔다. 맏물은 벌써 딴 지 오래고 이제 두 번째 시작이라고 한다. 골마다 빨갛게 익은 고추가 주렁주렁했다.

속사포로 퍼붓는 볕에 땀을 뻘뻘 흘리더니 바야흐로 한창 익는 시기다. 뒤뜰 모퉁이에도 채반의 고추가 절반이나 말랐다. 한나절 땡볕에 씨가 보일 정도로 바싹 마른 걸 보니 얼마나 덥고 된볕이었는지를 알겠다.

요즈음 따는 게 특별히 맵고 맛있는 것은 두 번째 혹은 세 번째 따는 시점에 해당되고 가장 물이 좋을 때라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날이 덥고 수분이 많을수록 빨갛고 맵게 영근다는 건 특별히 잘 익는 시점이 별도로 있음으로 해서 장떡의 고추장마냥 먹거리에도 적절한 시기가 있다는 것을 아울러 증명한다.

익는 건 물론이고 말리는 것 역시 그 때가 최적이다. 계속되는 장마 끝에도 모처럼 해가 날 때가 있는데 그 때야말로 짱짱한 땡볕이라 가차 없이 잘 마른다. 짜증이 날 만치 덥기는 해도 그래야 잘 익는 작물 때문에 1년 양식이라 할 고춧가루가 넉넉해지고 그로써 담근 고추장은 또 배앓이가 잦은 나의 특효약이었지 않은가.

고추장 예찬까지는 아니고 좋아하는 사람에 비하면 아주 적게 먹는 편이나 어떤 것이든 제대로 익는 게 간단치 않은 걸 해마다 돌아보는 것이다.

이 정 희 시인·둥그레 시 동인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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