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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속으로] 유엔탑을 되살리자

“대전의 역사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원래의 위치인 중앙로와 대흥로 교차지점으로 유엔탑을 옮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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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3.11.28 18:34
  • 기자명 By. 충청신문
▲ 유 병 우 씨엔유건축사사무소 대표

벌써 첫눈이 내리고 겨울이 성큼 다가왔다. 올해도 매년 10월 24일 ‘UN의 날’이 공휴일이던 옛 생각이 나는 가을이 지나칠 정도 짧게 지나갔다. 이렇게 또 한 해가 지나가는구나 하면서, 출근길에 옛 명정로 파출소(지금 중앙로와 대흥로 교차지점) 옆을 지나노라면, 이곳에 있던 작은 탑(塔)이 어렴풋이 생각난다.

대전지구 전승비로 세워진 옛 유엔탑(Monument of UN)은 제1공화국 시절인 1959년 긴 삼각형의 자투리땅인 옛 문화방속국 앞 대로변에 영문 이니셜 UN을 모티브로 심플한 디자인으로 세웠는데,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으나 1975년 10월 보문산 골짜기인 대사동 산3 번지로 살며시 이축하였다.

탑이 서있는 보문산은 한국전쟁 때 미24사단의 사병 3명이 우리 피난민을 모두 산중으로 도피시키며, 북한군과 맞서 싸우다가 전사한 장소라지만 우리의 관심 밖으로 밀려난 셈이다. 유엔탑은 2차 세계 대전이후 처음으로 발발한 민주주의와 공산국가간의 전쟁인 ‘한국전쟁’ 중에 파병된 미24사단 장병들이 많은 희생을 낸 공적을 알리기 위하여 세운 미군의 대전지구 전승비이다.

당시 P.J. Primrose씨의 조언에 따라 당시 제1202 건설공병단장인 대령 한승엽의 지휘로 건설하였는데, 이 전승비를 처음 이곳에 세운 이유는 역사적인 사건으로 기록될 만한 가치가 있는 장소였기 때문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미국, 영국,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연합군이 아프리카 전투에서 독일의 롬멜 군부대에 고전을 면치 못했던 원인이 바로 독일군 전차부대 때문이었다.

그래서 미국이 탱크를 격파하기 위해 휴대가 가능한 3.5“ 대전차 로켓포를 서둘러 개발 하였으나, 전쟁이 일찍 끝나는 바람에 직접 전투에는 투입하지 못했다. 이후 한국에서 전쟁이 터지면서 소련제 탱크를 북한군이 몰고 처 들어옴에, 장비가 미약한 한국군이 수류탄을 들고 전차에 뛰어드는 육탄전으로 대항하였다.

이에 미 24사단으로 대전차 로켓포를 급히 투입하였으나, 병사들이 서툴러서 사용 못하고 주춤거렸다.

이에 사단장 딘(Dean) 장군이 직접 로켓포를 메고 탄두를 처음으로 발사를 한 장소가 바로 군인극장이 있던 대전고 앞 4거리와 서대전 삼거리 사이의 도로였다는 기록에 따르면, 대흥동 성모병원 옆길인 옛 명정로 파출소(중구 대흥동 630-1) 인근임이 틀림없다. 당시 유엔연합군 소속의 미24사단은 7월 5일 ‘오산’에서 처음으로 적과 대면하였으며, 7월 17일 대전이 포위공격 받게 되자 20여 일 동안 결사적인 방어전을 벌인다.

특히 사단장인 딘(Dean)소장이 최전방에서 직접 전투를 지휘하다가 뒤늦게 적군의 포화를 뚫고 후퇴하다가 짚차가 산길로 뒹구는 바람에 도보로 금산 쪽으로 피신하다, 주민의 밀고로 북한군에 체포되었다. 목숨 걸고 대전을 사수한 참군인 ‘딘 장군’은 휴전협상 후 포로교환 때 돌아와, 이후 대전시의 명예시민이 되었다.

당시 참전한 16개국의 입장을 보면 모두가 넉넉하지 못한 상황에서도 자국의 젊은이들을 전장으로 보내준 고마움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에티오피아의 경우는 황실의 근위병만 보내 항복을 모르는 군인이기에 전사뿐, 전쟁포로가 한명도 없다 한다.

하지만 귀국 후, 셀라시에 황제가 몰락하고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 그들은 형제와 싸웠다는 이유로 자국 정부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고 한다. 호주나 뉴질랜드의 경우, 당시 국가 경제가 개발도상의 어려운 시기였기에 모병하면서 귀국 후 취업을 보장하였다.

하지만 그들이 혜택 받은 것은 무지개 색 꿈이 아닌 냉랭한 무관심뿐이었다. 그래서 참전 용사들이 간직한 기억은 참전하면서 들른 홍콩의 야경과 일본의 고궁에서 찍은 흑백사진뿐이고, 한국전쟁에 대한 모든 것을 가능한 지우고 살아갔다. 그래서 흔히 그들은 ‘잃어버린 전쟁’이라고 한다.

6월 25일-전쟁이 발발하고, 9월 28일-서울수복일 까지 불과 100여 일간 전투임에도 파병을 결정한 신속한 용단과 국회비준 등 어려운 과정을 마다하고 참전한 16개국의 결행은 지금 생각해보면 상상이 어려운 초법적인 협조였다.

우리는 현재 유엔 사무총장을 배출하고도, 해외 분쟁지역으로 연합군의 파병요청이 된 후, 국군을 파견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기간을 소모하는가를 견주어 보면 알 것이다.

더 큰 우리의 모순은 1991년 제46차 유엔총회에서 우리는 161번째, 북한은 160번째 유엔의 정식 회원국으로 가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입이 거절되었을 시기에는 국경일 이었는데, 요즘은 아무런 기념행사도 없음이 좀 어설프다.

새삼스럽겠지만 풍요를 누리는 이제는 그들의 은혜에 대한 보답을 차분히 다지기 위해서라도 주변에서 잃어버린 일들을 제자리에 갖다 놓아야 한다.

또한 개발이라는 미명아래 근대건축물을 자꾸 부수면서 역사를 지우려 하는데, 이제는 보다 큰 대전의 역사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원래 위치인 중앙로와 대흥로 교차지점으로 유엔탑을 옮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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