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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천주교 사제는 신자들에 군림하는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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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4.02.16 17:17
  • 기자명 By. 충청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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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의 한 신부가 가톨릭신문에 기고한 글에 이러한 말이 있다.

“새 사제가 되면 모든 사람에게 공손하고 겸손해 집니다. 또한 만나는 신자들 한 분 한 분이 무척 소중하고 귀한 분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누군가로부터 ‘신부님 위해서 기도해 드릴게요’라는 말만 들어도 ‘감사합니다. 저는 그 기도 덕분에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고 겸손한 고백도 진심으로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러한 마음을 잘 간직하고 산다면, 사제의 삶은 언제나 낮아지고, 또 낮아지는 참 좋은 삶을 스스로 익혀 갑니다.”

위의 말은 새 사제에게만 해당되는 말인 것 같다. 새 사제를 어디까지 정의해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위의 말은 새 사제에게만 해당되고, 일정기간이 지난 사제에게는 해당되는 말이 아닌 것 같다. 일정 기간이 지난 사제에게는 위의 말을 이렇게 바꾸어야 할 것 같다.

“새 사제가 아니고 일정기간이 지난 사제는 모든 사람에게 공손하고 겸손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만나는 신자들 한 분 한 분을 하찮게 여겨야 합니다.

그래서 누군가로부터 ‘신부님 위해서 기도해 드릴게요’라는 말을 들으면 ‘쓸데없는 짓 하지 마세요.’ 저는 군림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마음을 잘 간직하고 산다면 소왕국에서 황태자차럼 살 수 있으니 참 좋습니다.”

연초가 되면 사제들의 인사이동이 있다. 금년 어느 본당의 신부가 떠나가고 새로운 신부가 부임하게 되었다. 떠나가는 신부는 잘 배웅해 드리고, 새로 오는 신부는 반갑게 맞이하여야 할 것이다.

이 때 떠나는 신부나 새로 오는 신부는 본당의 사목회에서 배웅하고 영접을 하게 되는데, 새로 오는 신부는 사목회장이 전 근무지에 가서 모시고 오는 것이 관례가 되어 있다. 그래서 새로 오는 신부를 맞이하기 위해서 사목회장이 모시러 갔다. 그런데 뜬금없이 새로 오는 신부가 이런 말을 한다.

“내가 이런 대접을 받고 본당에 가기는 처음이다.”

사목회장은 당황했다. 어떤 대접을 받고 가야 만족스럽단 말인가? 인사이동 발표에서부터 모시러 갈 때까지 본당에서 처한 내용은 이러하다.

인사이동 발표 후 사목회장이 ‘본당으로 오시는 것 진심으로 환영한다’라는 전화 통화를 한 후, 이틀 뒤 새로 오는 신부님께 직접 방문하여 인사를 했다.

그리고 3일 뒤 다시 한 번 전화를 하여 모시러 가겠다고 약속을 했다. 다음날 여성부회장이 방문하여 인사를 하고, 이동하는 날 모시러 가서 그런 말을 들은 것이다. 참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본당으로 와서 ‘이런 대접을 받고 본당에 가기는 처음이다.’라는 말이 무엇인지 새로 오신 신부께 물어 봤다. 사목회장도 사목회장단도 사목위원도 아무도 인사를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목회장이 찾아오지 않았나 하고 말을 하니 그것은 온 것이 아니라고 한다. 찾아오려면 사전에 전화를 하고 정장차림에 넥타이를 매고 와야지, 일을 하다가 오면 그런 것은 온 것도 아니란다. 신자들이 특히 사목회장이 성당에 구속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일상생활을 하면서 시간을 내서 봉사를 하는 것이지 성당에 억매어 봉사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일을 하다 잠시 시간을 내어 찾아가는 것도 고마워해야할 일이지, 찾아온 것도 아니라는 말을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다음이 더욱 가관이다. 사목회장과 사목위원들은 본당 주임신부를 황제로 모셔야 한다는 것이다. 사목위원과 본당신자들은 본당주임신부를 일상의 어느 것보다 우선하여 황제로 대접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을 하다가도 본당 신부가 찾으면 만사 제쳐놓고 달려와야 한다는 것이다.

천주교 세제들은 신자들 위에 군림하는 존재인 것인가? 신자가 있은 다음에 신부가 있는 것이지, 신부가 있은 다음에 신자가 있어야 한다는 말인가?

사목회장이 설명한다. 본당의 사목위원은 시간이 날 때 봉사를 위해서 희생하는 것이지 만사를 제쳐 놓고 본당에 봉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을 하니, 신부가 하는 말이 ‘그러면 본당 주임신부를 일상의 일보다 후 순위로 놓는 것이냐?’한다.

참 말이 통하지 않는 신부다. 다시 설명한다. 신자들과 사목위원들이 바쁠 때에는 교중 미사도 때로는 빠지기도 한다. 그러한 상황에서 본당신부가 부르면 만사 제쳐 놓고 오라는 것은 말이 안 된다라고 설명을 했더니 끝까지 말을 다 듣지도 않고 부르르 떨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나간다.

여기에서 생각해본다. 어느 신부님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신부를 믿지 말고 하느님을 믿고 참아라.’ 그러나 눈 앞에 이러한 신부가 있는데 어떻게 신부를 믿지 않고 하느님만을 믿고 따를 수 있겠는가?

신부들이 강론 시간에 ‘겸손해라, 용서해라, 일곱 번씩 일흔번이라도 용서해라’라고 강론을 한다. 그러한 강론은 일반신자들의 몫이지 사제들의 몫은 아닌 것 같다. 겸손하고 용서하고 참고 견디는 것은 일반 신자들이나 하는 것이고, 사제들은 안하무인격으로 대접을 받아야 하고 본당에서 황제처럼 떠 받들여져야 하는 것인가?

또한 참고 견디는 것도 일반신자들이나 하는 것이고, 세제들은 한 번도 다 듣지 않고 화를 내는 것이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자세인가?

영세를 한지 20여년이 지났건만 이처럼 황당한 일을 겪는 것은 처음이다.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사제가 평신도의 가슴에 못을 박는 권리가 있다는 말인가? 중이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절이 떠날 수는 없는 것이다.

실망도 유분수지 이러한 상황에서 성당에 나간다는 것이 이상한 일이라 생각한다. 이제부터는 본명을 떼고 살면서 사제의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살펴볼 일이다. 하느님을 앞세우고 거짓위장을 하는 사제들이 얼마나 이 사회를 개선하고 있는지 살펴볼 일이다.

땡 중이라는 말은 있다. 그러나 땡 사제라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이런 것을 두고 땡 사제라고하면 어떨까?

이런 일을 겪고 나니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교구의 주교님도 항상 웃고는 있지만 그 이면에는 어떠한 가면을 쓰고, 어떠한 가식을 쓰고 있을까 의심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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