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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속으로] 시 쓰기는 자기 치유의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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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4.05.15 20:34
  • 기자명 By. 충청신문
▲ 최 광 임 시와 경계 부주간

“슬플 때마다,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 마다 시를 써 보십시오. 굳이 시형식이 아니라도 그리울 때마다, 슬플 때마다 글을 써 보십시오.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으로서 큰 힘이 될 것입니다”

4·16 세월호 참사는 우리 사회의 부조리함을 총체적으로 드러낸 국치일로 남게 되었다. 온 국민은 집단 죄의식과 자기비하에 빠졌으며 슬픔과 우울과 분노의 도가니 속에서 일상을 제대로 꾸리지 못하고 있다. 이런 집단적 슬픔이 오늘로서 한 달째며 이 시간도 진행되고 있다.

어찌 그렇지 않으랴. 지난 11일 검찰은 “세월호 침몰사고가 났을 때, 해경이 도착한 즉시 배에 들어갔더라면 모두를 구조하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처럼 사고 이후 전부를 살릴 수 있는 몇 번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는 자책과 분노에서 헤어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300 여명 넘는 산 생명이 물속에 수장되는 상황을 동시상영으로 목도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그것도 꽃 같은 어린 학생들 수 백여 명이 어른들의 사악함과 무능으로 죽어가는 참극을 속수무책 지켜본 후이기에 슬픔과 분노가 쉽게 가실 리 만무하며 한두 달 지난다고 하여 심리적 충격이 쉽게 가라앉을 일이 아닌 것이다.

하여, 한동안 가수는 추모의 노래 한 곡 부를 수 없었으며 시인은 추모시 한 편 짓지 못할 만큼 집단 무기력과 실어증에 빠지기도 했다. 인간의 영혼을 위무할 수 있는 것들은 세월호의 참담한 비극 앞에 무용지물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시가 생의 절대적 가치라고 여기며 자발적 가난마저 마다않고 의연하게 살아오던 시인들의 절망감은 상상 이상으로 컸다. 태생적으로 타자의 고통에 민감한 시인이 또 고통의 연대를 통한 신생의 힘을 재생산해 낸다는 시의 신성은 캄캄한 선실에 공기 한줌 채워주지 못하고 썩은 동아줄 한 번 내려주지 못한 채 실시간 물속으로 잠겨가는 어린 새끼들의 죽음 앞에 무용했기 때문이다. 고기잡이배의 성긴 그물만도 못한 가치라는 자책을 감수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제일 먼저 말문이 트여 나온 것은 가수들의 추모노래였으며 시인들의 추모시였다. 그렇다. 사람이기 때문이다. 어떠한 방식으로든 쌓인 것은 풀어내야 하는 생리를 가진 사람이기 때문인 것이다. 처음엔 한 사람이, 다음엔 두세 사람이 부르다 급기야 여럿이 따라 불렀으며 시인 한두 명이 추모시를 낭독하다 울먹이다를 반복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가족을 잃은 슬픔을, 자식을 잃은 한을, 무능한 어른들에 대한 분노와 아무 죄 없이 죽어간 아이들에 대한 부끄러움과 미안함을 담아 제를 올리듯 시를 지어 낭독했던 것이다.

바로 노래는, 시는 인간 삶의 내적 양식이기 때문이다. 물리적 배고픔은 물로 목을 축이든 곡기로 배를 채우든 할 수 있는 것이겠으나 슬픔을 달래는 일은 물리적인 것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이유다. 간절한 슬픔을 담아, 미안함을 담아, 보고픔을 담아 표현하는데 일상의 밥수저를 들 듯 아무렇게나 웅얼거려서는 아니 될 일이기 때문이다. 그 간절함이 지축을 흔들고 하늘을 울려 마침내 피안의 저쪽까지 전해지기 위해서는 ‘의식’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지금 우리가 가진 상처가 그 못지않게 크지 않던가 말이다.

시가 죽어가는 생명 하나를 살리지는 못했지만 남겨진 자의 슬픔을 대신하여 함께 울어주는 눈물은 될 수 있다. 시는 슬픈 존재들이 먹고 살 수 있는 양식인 때문이다.

그러니 시인을 일러 ‘곡비(哭婢)라 하지 않던가. 또한 시를 일러 희극에서 탄생하는 것이 아닌 비극에서 탄생하는 것이라 하지 않던가. 그러므로 비극의 노래가 시인 것이며, 쥔을 대신하여 곡하는 종이 시인이라는 말이 되는 셈이다. 하여, 세월호 사고 희생자와 그 가족들에게 권하고 싶은 것이 있다.

사고 규명이야 법과 시민이 제대로 해나갈 것이라는 긍정적 생각으로 남겨 둡시다. 그렇다면 이제 살아남은 여러분은 한을 안은 채 무슨 힘으로 새털구름같이 많은 날들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종내, 여러분은 혼자 의연하게 버티어 서서 희생된 내 아이, 내 가족의 몫까지 살아내야 할 운명을 더한 것입니다. 남은 가족 여러분께서 강건하셔야 할 이유입니다.

슬플 때마다,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마다 시를 써 보십시오. 굳이 시형식이 아니라도 그리울 때마다, 슬플 때마다 글을 써 보십시오. 여러분의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으로서 큰 힘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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