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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속으로] 의도적인 지체

“내가 상대방을 잘 만나야 하지만 나도 역시 나를 만나는 상대방에게 손수건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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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4.07.10 18:19
  • 기자명 By. 충청신문
▲ 김 등 모 대전기독교연합회 회장·영락교회 담임목사

우리의 삶에는 여러 가지 만남이 있다. 만남 중에는 벌꿀 같은 만남이 있다.

벌꿀은 달다. 그 단물만 빨아먹고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그런 만남이다. 또 생선 같은 만남이 있다. 생선은 가까이 하면 비린내가 난다. 알아갈 수록 우리를 실망시키는 그런 만남이다.

그런데 손수건 같은 만남이 있다. 힘들어 땀을 흘리면 땀을 닦아 주고, 슬프고 괴로워서 울면 곁에서 눈물도 닦아 주는 만남이다. 손수건 같은 만남이 바람직한 만남이다. 내가 상대방을 잘 만나야 하지만 나도 역시 나를 만나는 상대방에게 손수건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런 세상의 어떤 만남과도 비교할 수 없는 만남이 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과의 만남이다. 베다니의 사는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나사로의 삼남매는 예수님을 만난 자들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알되 기쁨과 슬픔과 괴로움을 함께 나눌 수 있는 특별한 만남으로 발전했다.

어렵고 힘들 때 제일 먼저 생각나는 사람, 내가 힘들 때 나보다 더 나를 도와줄 것이라고 기대되어지는 사람이 있는가? 힘들 때, 염려되는 일이 있을 때 예수님이 가장 먼저 생각나길 바란다. 마르다 자매는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가장 먼저 예수님께 연락을 했다. 그 만큼 예수님을 신뢰하고 예수님 역시 마르다 남매를 사랑하셨다.

그런데 의외의 일이 일어났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4일 동안이나 지체를 하셨다. 결국 나사로가 죽고 그를 장사지낸 다음에 베다니의 두 자매에게 나타나셨다. 이상하지 않는가? 마을 사람들이 모두 알 정도로 예수님은 나사로의 가족을 특별히 사랑하셨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죽어가는 나사로에게 즉시 달려오지 않았던 것이다. 마르다의 여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늦게 오심에 실망했음에 틀림없다. 아니 실망을 넘어 예수님을 원망하고, 예수님에 대해 섭섭한 감정을 가졌을 것이다. ‘예수님은 정말 우리를 사랑하시기라도 한 것 일까?’라는 의문을 갖기도 했을 것이다.

이런 실망감과 섭섭함이 마리아 자매의 것만은 아니다. 우리 역시 비슷한 경험을 갖고 있다. 분명히 믿음으로 기도한다. 간절함으로 예수님을 찾는다. 그런데 기도응답이 생각보다 더디고 굉장히 지연될 때가 있다. 오히려 상황이 악화되고 나의 기대가 산산이 무너질 때가 종종 있다. 절망을 넘어 주님에 대한 신뢰가 깨어지고, 기도할 힘조차 잃어버리는 순간 말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긴박한 상황에 대해 우리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계신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요11:4)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며,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이 사건으로 인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이었다. 이미 마르다를 비롯한 주위 사람들은 예수님은 각색 병자를 고치시는 분으로 알았다. 그래서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께 와 주시도록 연락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알되 병을 고치는 분으로만 알았다. 오늘날에도 병을 고치는 사람은 많다. 당시에 의술이 있는 의사도 죽어가는 사람을 살렸다는 예는 충분히 많다. 마르다는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요11:21)라고 말한다. 모든 병을 고치시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굉장한 믿음이다. 그러나 그것은 충분한 믿음은 아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정확하게 안다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단순히 기적을 일으키고, 병자를 고치실 수 있는 대단한 사람 정도가 아니라 사람의 생각과 한계 너머에 있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실재가 된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에 절망도 이기고 죽음도 이기신다. 이것을 보여주시길 원하셨던 것이다.

그렇다. 예수님에겐 죽은 사람도 잠자는 사람과 같다. 예수님은 베다니에 오셔서 잠든 사람을 깨우듯 나사로를 무덤에서 일으켜 살리셨다. 자동차를 만든 제조사가 고장 난 자동차를 수리할 수 있듯,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죽은 사람도 살리신다. 예수님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죽은 나사로를 살린 사건을 통해 보여주셨다.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은 바로 이러한 믿음이다. 즉 죽은 자도 살리시는 창조주 예수님에 대한 믿음 말이다.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요11:25)이라고 선언하신다. 아무리 훌륭한 믿음이라도 예수님이 부활 자체요,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임을 믿지 못한다면 완전한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

이제 예수님께서 그토록 사랑하셨던 나사로가 병들었음에도 지체한 의도가 확실해졌다. 우리가 간절한 마음으로, 믿음으로 기도해도 더디 응답받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의 상황과 형편을 통해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더 확실히 알려주기 위함이다.

예수님이 생명의 주관자요, 부활의 주님이심을 알려주시기 위함이다. 우리의 삶 속에서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통해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함이다. 이제 우리의 삶속에서 예수님의 사랑과 예수님 능력을 제한하지 말고 인내하며 예수님의 일하심을 기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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