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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속으로] 백년의 여행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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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5.04.02 18:47
  • 기자명 By. 충청신문

최근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도 넘어지셔서 고관절 골절을 당하셨다. 어쩔 수 없는 노환의 현상이지만, 이를 지켜보는 아들의 마음은 처연하기 이를 데 없다. 다행히 수술과 그 예후가 좋으셔서 경치 좋은 요양병원에 모셨는데, 이참에 어머니의 일생을 당신의 입장에서 간단하게 정리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남편이 하늘로 발걸음을 옮긴 지 벌써 70일이 넘어서고 있다. 그 날은 막내아들과 며느리의 결혼기념일이라 기억하기도 쉽다. 내 나이 90세. TV를 켜면 100세 시대라고들 한다. 어느 통계치를 보면 내 나이대의 인구수를 1만4000명 정도로 추산하는데,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도 5만6000명이나 된단다. 전국노래자랑의 MC를 보는 송해 씨도 있고. 나와 동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이 건강하게 왕성한 활동을 하는 모습을 보면 부럽기도 하다.

지난 설 연휴 전 날이었다. 새벽녘 화장실에 가다가 다리가 삐끗하여 넘어졌다. 막내아들이 달려 나왔다. 엉덩방아를 찧었는데 남편 생각이 났다. 자전거를 타다 넘어진 뒤 고관절 골절로 이어지고, 그로부터 3개월 반 만에 회복하지 못하고 내 곁을 떠난 기억이다. 혹 나도 같은 길을 걸을지도….

막내아들과 함께 병원에 가서 처음 찍은 X-ray와 CT는 겉부분이 약간 깨졌을 뿐 크게 금이 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의사는 골다공증 등 노인들의 경우에는 안심이 안 된다며 연휴 이후에 정밀 검진을 다시 하자고 하였다. 일주일이 지난 뒤 막내아들과 함께 다시 검진을 받았다. 의사의 예측대로 다친 부분은 2/3정도가 금이 간 모습으로 찍혀 나왔다. 의사 선생은 수술을 권했다. 다행히 남편이 받은 수술과는 달리 간단했다. 골절부위에 플레이트를 대고 스크류로 고정하는 수술. 수술은 잘 끝났고, 사흘 만에 워커를 붙잡고 걷는 연습을 할 정도로 회복 속도도 빨랐다. 좋은 병원과 좋은 의사, 그리고 친절한 간호사들을 만난 행운도 따랐던 것 같고. 지금은 시골의 어느 환경 좋은 요양병원으로 옮겨서 재활훈련을 하고 있다.

어느덧 결혼한지도 70년 가까이 된다. 그동안 이 땅에는 숱한 역사적 사건들이 펼쳐져 왔다. 일제시대 소학교를 다닌 죄로 우리말보다 일본말을 더 열심히 배웠던 기억, 일본의 진주만 공격과 남녀를 불문한 징집 광풍, 치과의사로 활동했던 아버지 덕분에 신변안전을 담보할 수 있었지만, 식민지의 처녀라는 자괴감이 나를 에워쌌다. 1945년 광복 이후 얼마 안 있어 결혼하고, 첫 아이를 출산한 지 얼마 안 되어 터진 6·25전쟁은 신혼의 즐거움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피난 갔다 돌아온 집의 안방에 지붕을 뚫고 떨어져 있는 사람만한 돌덩어리. 전쟁 중 폭격으로 집이 없어지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위안을 삼아야 했다. 다행히 남편도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왔고, 폐허 같았지만 농촌의 논과 밭은 그대로였다. 아이를 강보에 싸 등에 업고 밭일 하면서 일상생활로 돌아왔지만 가정보다는 밖에서의 활동에 더 열중한 남편의 모습에 화가 나기도 하였다. 나는 시집살이와 친정에서의 맏딸 역할을 동시에 해내야 했다. 하지만, 내 남동생 대학 보낸다고 논 팔아서 학자금을 댔던 것과 처제를 사범학교에 입학시킨다고 동분서주했던 남편에게 미안하기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교편을 잡은 남편을 따라 고향땅을 벗어나게 되었다. 당시엔 교사들에게 무료 관사를 제공하던 시절이어서, 남편의 월급 상당액을 저축할 수 있었다. 나도 장 볼 때는 10리길을 마다않고 걸어 다녔으니 재산 형성에 일정부분 기여한 것이리라. 건강도 같이 챙긴 효과도 보았던 것 같다. 그러던 중 나는 우리 가족 일생일대의 중대한 결단을 내렸다. 남편을 따라 충남 서부 해안지대에 머물러 있다가는 가족의 발전을 담보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했다. 대전으로 갈 것이냐, 서울로 갈 것이냐 고민하다 대전으로 향했다. 그 결정이 결국 둘째와 막내아들을 대전 사람으로 만들었고, 나도 반평생을 대전에서 보내게 되었다. 삶의 터전도 신흥동-판암동-비래동-석교동-중촌동-둔산동-관저동 등을 거쳤으니 유성구만 제외하고 대전시내 안 거친 곳이 없다.

이제 내 수명이 얼마나 남았을 지는 절대자만이 알 것이다. 아이들 잘 키워냈고, 이 땅에 흐르는 역사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면서 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열심히 살았던 것에 위안을 삼는다. 남은 생도 하루하루를 아깝지 않게 충실히 살아가리라. 건강하게 100년을 채우면서 아들들의 성공을 지켜본다면 더 없이 행복할 것이다. 먼저 간 남편을 기억하면서….

이서령 새정치민주연합 대전중구지역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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