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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세평] ‘미생’을 다시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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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5.05.20 17:48
  • 기자명 By. 충청신문
▲ 김 정 호 백제문화원장
작년 연말, 드라마 ‘미생’이 키워드에 오른 적이 있다. 재미있어 다시 보고, 궁금해서 원작을 구해 읽어 보았다. 원작은 웹툰이다. 만화라서 이채로웠다. 주인공 ‘장그래’. 대한민국 비정규직의 애환을 그렸다.
 
미생(未生) : 아직 살아 있지 못한 자. 착수, 도전, 기풍, 정수, 요석, 봉수, 난국, 사활, 종국. 1권에서 9권까지 바둑 해설이 붙여져 있다. 조훈현과 녜웨이핑의 제1회 응씨배(1988년) 결승 5번기 최종국 기보가 올라 있다. 바둑과 회사원을 연결하여, 웹툰을 만들다니, 대단한 공력이었다.
 
세사기일국(世事棋一局), ‘인간사란 그저 한 판의 바둑일 뿐’이라고 했던가. 바둑의 역사는 4000년, 오래 되었다. 바둑은 집짓기 게임이다. 집을 지으려다보니 경계선을 둘러싼 분규가 일기 마련이다. 치열한 전투가 이어진다. 돌의 삶과 죽음, 그 과정에서 수많은 격언과 교훈이 생겨나고, 인생을 바둑에 비유하게 되었다.
자기 땅을 확보하려면 상대를 공격해야 한다. ‘미생’에는 바둑의 생존법칙이 깔려 있다. 위기십결(圍棋十訣). 삶의 지혜로 음미할 만하다.
 
1, 부득탐승: 이기려거든 욕심을 버려라. 2, 입계의완: 상대의 경계는 서서히 들어서라. 3, 공피고아: 공격할 때는 먼저 자신을 돌아보라. 4, 기자쟁선: 돌을 버리더라도 선수를 잡아라. 5, 사소취대: 작은 것을 버리고 큰 것을 취하라. 6, 봉위수기: 위험에 처하면 마땅히 버려라. 7, 신물경속: 가볍고 빠름을 신중하게 하라. 8, 동수상응: 움직일 때는 서로 호응하라. 9, 피강자보: 상대가 강할 때는 지켜라. 10, 세고취화: 세력이 약할 때는 타협하라.
 
‘장그래’는 위기십결을 새기면서, 어려움을 대처해 나간다. 아생연후살타(我生然後殺他). 내가 산 후에 적을 칠 수 있다. 위험에 처했을 때 피해를 최소화하고, 자신을 돌보고, 상대의 힘에 따라 처신하는 방법을 배운 것이다.
 
아마추어는 18급에서 7단까지, 프로는 초단에서 9단까지 있다. 위기구품(圍棋九品). 애칭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초단 : 수졸(守拙). 졸렬하지만 제 스스로 지킬 줄을 안다. 2단 : 약우(若愚). 어리석지만 움직일 줄을 안다. 3단 : 투력(鬪力). 싸워야 할 상황에서 싸울 수 있게 되었다. 4단 : 소교(小巧). 작게나마 기교를 부릴 수 있다. 5단 : 용지(用智). 기교를 넘어 지혜를 쓸 줄 안다. 6단 : 통유(通幽). 그윽한 경지에 이르렀다. 7단 : 구체(具體). 조화와 중용으로 온전히 갖추었다. 8단 : 좌조(座照). 모든 변화를 한눈에 꿰뚫어 본다. 9단 : 입신(入神). 승부의 허무를 초월한 경지에 노닌다.
 
예전엔 정치 9단이라는 표현도 썼었다. 그러고 보니, 바둑용어가 우리 생활 속에 알게 모르게 많이 스며있다. 실리와 세력, 수읽기, 장고 끝에 악수 둔다. 포석, 정석, 호구, 수순, 복기, 국면, 판세, 정수, 꼼수, 헛수, 만패불청, 꽃놀이패 등등.
 
바둑 규정은 일수불퇴다. 고수들은 매수마다 의미를 부여하며 착점한다. 바둑은 깊이깊이 생각을 하여야 한다. 그런데, 인터넷 사이버 공간에서는 10초 바둑이 현란하다.
 
대한민국 비정규직 2년 계약직. “평소대로만 하면, 정사원 되는 거죠?” 대사가 귓가에 쟁쟁하다. 미생은 완생을 꿈꾼다. 그러나, ‘장그래’ 씨에게 귀뜸해주고 싶다. 정규직 사원도 완생은 아니다. 평생직장 개념이 없어진 지 오래다. 정년퇴직을 하고 나서도 완생은 아니다. 죽을 때까지 완생은 없다. 우리 모두는 미생일 뿐이다. 바둑은 승패가 명확하지만, 인생에서는 아마추어도 프로도, 승자도 패자도 없다.
 
긍정적인 사람. 자존심이 강하고 모험적이면서도 타협할 줄 아는 사람. 수줍음을 지니고 겁이 많으면서도 온몸을 던지며 분노할 줄 아는 사람. 사람 흉내내지 않고 사람답게 행동하는 사람. ‘미생’에서처럼, 맑은 윗물과 맑은 아랫물이 만나기를 기대한다.
 
일자리 잃은 사람, 아예 취업경험이 없는 사람이 늘고 있다.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우리 바둑판에 곤마, 미생마가 너무 많다. 계약기간을 4년으로 늘리자는 ‘장그래법’. 난국을 타개할 묘수는 없는 걸까? 가장 훌륭한 묘수는 정석이라고 한다.
 
어거지로 자충수를 두고, 자꾸 헛패를 쓰는 세태가 안쓰럽다.
 
김 정 호 백제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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