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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세평]담쟁이를 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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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5.08.13 09:47
  • 기자명 By. 충청신문
▲ 김 정 호 백제문화원장
폐허된 백제시대 산성(山城) 답사 길에 소나무를 타고 오르는 덩굴식물을 발견했다. 담쟁이다. 줄기가 엄지손가락보다 굵다. 당뇨에 좋다고, 신명이 났다. 산야초 박사가 웃는다. “소나무나 참나무를 붙들고 자란 것은 괜찮은데, 바위를 타고 올라간 것은 독성이 있어 달여 먹으면 안 돼요.

조선시대에는 한약재로 썼다는데, 요즘은 안 쓴대요.” 어쨌든 민간요법에서는 당뇨병의 혈당을 떨어뜨린다고, 관절염, 근육통, 어혈, 신부전증 등등에 효력이 있다고 퍼져 있다. 인간의 욕망은 가리는 게 없다. 소나무 담쟁이를 찾는다.

담쟁이는 포도과에 속한 낙엽덩굴식물이다. 6∼7월에 가지 끝 잎 뒤에 황록색 꽃을 피운다. 8∼10월에 포도알 같은 까만 열매를 맺는다. 담쟁이는 인간보다 먼저 지구상에 존재했다. 1억 년 전 즈음 신생대 초기 사이에 많은 속씨식물들이 나타나 진화한 것으로 추정한다.

야생에서 키 큰 나무나 바위를 타던 것이, 도심에서는 담이나 벽을 탄다. 담쟁이는 생명력이 질기다. 줄기마다 달라붙는 흡착근(吸着根이) 있다. 더 많은 햇살을 받기 위하여 십여 미터까지 기어올라 살아남았다.

아이비 리그(Ivy Leegue). 미국 북동부 전통 대학 건물이 담쟁이로 둘러싸였다고 해서 붙여진 별칭이다.

담쟁이는 숲은 물론, 도시를 점령하고 있다. 붉은 벽돌 사랑이 고풍스럽다. 유치원, 학교, 도서관, 미술관, 박물관, 야구장, 교회, 아파트를 에워싸고 있다. 옹벽, 교각, 도로 비탈면 등에 녹화용으로 심고, 베란다 정원에 분재로 기른다. 가히 담쟁이 천국이다. 여름철 무성한 초록 잎, 가을날 빨간 단풍! 무리지어 있어서 눈부신 장관을 연출한다.

담쟁이를 보는 시각은 다양하다. 특히 문화재 관리 차원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옹호파와 제거파가 각기 자기주장을 세우고 있다. 담쟁이 그 자체를 포함하여 문화유산으로 보존하여야 한다는 의견에 공감한다. 반대로 건축물의 본래 성질이나 구조적 안전을 저해한다는 의견도 설득력을 갖는다. 실제로 한양 도성 성곽이나 수원 화성, 해미읍성 등에서 담쟁이를 대대적으로 제거한 적이 있다. 고택. 무덤, 서원, 향교, 돌담길, 어느 것이든 상극이 아닌, 상생을 모색해야 한다.

인간이 자연생태계를 좌지우지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인간의 관점에서 담쟁이를 본다. 담쟁이는 상대방을 뚫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붙잡고 올라간다. 태생적 존재가치가 그렇다. 담과 담쟁이의 관계가 그렇다. 담이 없으면, 담쟁이도 없다.

오 헨리의 단편소설 ‘마지막 잎새’. 폐렴에 걸린 여주인공이 창밖 마지막 남은 담쟁이 잎과 자신의 운명을 동일시하는 사실을 알게 된 늙은 무명 화가가, 사나운 비바람 속에서 잎 하나를 그려 놓았다. 여주인공은 희망을 찾았지만, 늙은 화가는 폐렴에 걸려 죽었다. 마지막 잎새는 지지 않는다.

담쟁이를 예찬한 시들이 여러 편 있다. 그 중 도종환의 시 ‘담쟁이’는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다.

“저것은 벽/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 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중략)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광복 70주년이다. 빼앗긴 땅과 주권을 되찾았는가? 속박에서 벗어나 온전히 자유롭게 되었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가난에서 싹을 틔워야 했고, 좌절에서 일어서야 했다. 억압상태에서 벗어나려고 꿈틀거려야 했고, 고통에서 근육을 단련시켰다. 상실에서 무릎으로 다시 시작했다.

지금, 우리에게는 절망의 벽이 너무 많다. 지금, 대한민국의 우리는 무디고, 분열되고, 나약해져 있다. 어찌 할 바를 모른다. 폭풍 속 마지막 잎새 한 잎 새기는 심정, 그만 싸우고 자학하지 말 일이다. 희망, 손잡고 함께 가자.

담쟁이를 본다. 덩굴덩굴, 넝쿨넝쿨. 폭염 속, 수직 벽 타고 올라가는 행렬이 찬란하다. 늠름하고, 장하다. 결단코, 탐욕이 아닌, 생존의 치열함이다.

식물에게서 동물들이 배워야 할 것이 있음이다.

 

김 정 호 백제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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