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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세평] 밥값 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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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5.09.16 17:52
  • 기자명 By. 충청신문
▲ 김 정 호 백제문화원장
점심 시간마다 결정장애다. 무얼 먹을까? 큰 회사에는 사내식당이 있지만 그렇지 못한 직장인은 고민이다. 밥집을 정해놓기도 하고 그때그때 돌려가며 먹기도 한다. 도시락을 싸오는 사람도 있다. 식이요법을 하는 환자이거나, 극진한 어머니 사랑 효자이거나, 마누라가 주머니 아끼라고 쥐여 주거나 상황에 따른다. 자리를 못 비워서 배달하는 경우도 있다. 끼니 때 손님은 반드시 밥을 함께 먹어줘야 한다.
 
밥의 종류는 다양하다. 보리밥, 오곡밥, 콩나물밥, 곤드레나물밥, 굴밥, 송이밥, 돼지국밥, 비빔밥, 회덮밥, 볶음밥, 김밥. 콩밥도 있고, 헛제삿밥도 있고, 사잣밥도 있다. 그 중에서도 밥은 오롯이 쌀밥을 말한다. 이천, 여주, 각지 쌀밥집이 성황을 이룬다. 국, 반찬이 오르지만 주식은 밥이다.
 
대흥동 허름한 밥집에 들렀다, 메뉴판 아래에 문구가 있다. “밥값은 하셨는가?” 깜짝 놀라 수저를 떨어뜨릴 뻔 했다. 손님을 훈계하는 주인장 내공이 예사롭지 않다. 저게 무슨 소리냐고 눈을 껌뻑이고 있었더니, 스님들 법문을 모은 책 제목이란다. “밥값 했는가”가 원래 표기인데, 점잖게 존칭을 붙였다고 웃는다. 5000원 백반 값을 곧 6000원으로 올려야겠다고 미안해한다.
 
 ‘밥값 하다’에는 다의적 뜻이 내포되어 있다. 밥값을 벌었는가? 사람 구실을 했는가? 경제적 의미에서 철학적 의미로 확장되었다.
 
오늘 밥값은 내가 내지, 밥 사주는 선배가 좋았었다. 요즘은 각자 낸다.
 
내가 먹은 밥값은 얼마나 될까? 단순하게 60년 삼시세끼 5000원씩 계산기를 두드려 보니, 60년×365일×3끼×5000원=3억2850만원이다. 무려 3억 원이 넘는다. 무겁다. 먹은 밥값도 못하고 꼴값 떨면 안된다. 한 달 밥값 45만원, 네 식구 먹여 살리려면 180만 원이다. 최저임금 하루 8시간씩 한 달 일하면 150만 원이 안된다. 3500원으로 계상돤 출장비 식대를 보며 웃는다. 주는 사람은 제값을 주어야 하고, 받는 사람은 제값을 해야 한다. 제값을 주지 않거나, 제값을 하지 않는 것은 엄한 죄다.
 
햇반, 주먹밥, 컵밥이 등장한다. 맛집, ‘먹방’이 휩쓸더니, ‘집밥’이 인기를 탄다. 불안한가? 밥 문화는 세태를 반영한다.
 
 우리 민족은 배고픔에 시달려 왔다. 진지 잡수셨습니까? 일상적인 인사말이었다. 춘궁기, 보릿고개가 오래 지난 일이 아니다. 우리 세대 부모는 자식을 공부시키는 게 삶의 목표였다.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대학을 보냈다. 일제치하에서 해방되어 6·25 전쟁을 겪고 군사독재를 지나 자식이 다칠까봐 노심초사하며, 대학 나온 며느리, ‘사’자 붙은 사위를 얻는 게 욕심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어찌된 게 대학 나오고도 신통치 않다. 밥벌이를 못하니, 장가도 시집도 미룬다. 애도 안 낳는다. 밥값을 하고 싶어도 못한다.
 
밥을 많이 먹는 사람을 ‘밥보’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ㅂ’이 탈락되어 ‘바보’가 되었다. 바보의 어원이 그렇다. 밥만 축내는 인간, 밥벌레, 밥버러지. 일은 하지 않고 제 구실을 못하는 사람. 기업가나 정치가나 학자나 종교인이나, 내로라하는 밥통 부류들이 요란하다. 제 밥그릇 챙기기에 눈 어두어 상대의 밥그릇을 엎는다. 빼앗아 독식하는 밥은, 사람의 밥이 아니다.
 
한국인은 밥심으로 산다. 밥 말고 다른 것을 아무리 먹어도 허전하다. 떡, 국수, 라면, 피자, 빵, 술과 고기를 먹고도 집에 가서 꼭 밥을 먹고 잔다.
 
임금에게는 수라, 어른에게는 진지, 제사에 올리는 것은 메라고 한다. 백성들이 먹는 것은 밥이다. 밥이 하늘이다. 밥이 사람이고 사람이 밥이다. 농사짓는 사람, 밥 짓는 사람, 밥상 차리는 사람, 설거지하는 사람, 숱한 땀이 뜸을 들인 귀한 밥이다.
 
풍요로운데, 결식 국민이 늘고 있다. 학교 무상급식을 놓고 엇갈리는 나라, 무료급식 밥차에 우르르 줄을 서는 복지국가다. 역설적으로 먹고 살기 힘든 시대, 착한 밥 한 그릇 감당하기가 버겁다. 당당하게 인간답게 구실을 하며 살고 싶다. 밥값 하셨는가? “네!”라고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자괴감. 밥을 먹을 것인가 밥에게 먹힐 것인가, 밥줄이 천 길 낭떠러지다.
 
밥이 보약이다. 밥은 모든 것을 평정한다. 회의가 길어지면, 누군가 외친다. “밥 먹고 합시다.” 식후 30분, 밥 먹어야 약을 먹는다. 먹어야 산다.
 
원도심 경기침체 한숨 쉬며 밥값 올린다는 대흥동 밥집에서, 하얀 쌀밥 화두를 곱씹는다. 창밖, 쪽빛 가을 하늘이 참 곱다. 입에 들어가는 밥술도 제가 떠 넣어야 한다. 나이 탓, 세상 탓 아니다. 나, 오늘 밥값 했는가? 
 
김 정 호 백제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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