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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위해 살신성인한 충의정신, 교과서에 실렸으면…”

본보 충장공 남이흥 비장한 순국 연재 남균우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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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5.12.13 19:07
  • 기자명 By. 강주희 기자
[충청신문=강주희 기자 ] 아마 시뻘건 불기둥이 치솟고 태산을 번쩍 들어 땅에 내리치는 엄청난 굉음에 땅이 진동했을 것이다. 쾅. 먼지가 자욱하게 하늘을 가리고, 매캐한 화약 냄새가 진동했을 화약고 자리는 깊은 웅덩이가 패고 화약고를 중심으로 사방 수십 미터가 초토화됐을 것이다. 아수라장인 전쟁터에 한동안 침묵이 흘렀을 것이다. 화산이 폭발한 것 같은 열기와 거센 폭풍은 수천 명의 목숨을 휩쓸어 갔을 것이고, 산자들은 아군이건 적군이건 정신이 멍한 채 놀란 눈만 껌벅이고 있었을 것이다.
 
정묘호란 안주성 싸움. 밀물처럼 밀려드는 청나라 군대에 맞서 맹렬하게 싸웠지만 군세가 기울고 패색이 짙어지자 남이흥 장군은 적군을 자신 쪽으로 끌어들였다. 장수를 잡으려는 적병들도 장군 쪽으로 벌떼처럼 몰려들었다. 장군은 화약고를 등에 지고 있었다. 최후의 순간이 왔다고 판단한 장군은 마음을 굳혔다. 이미 임금에게 ‘일만 번을 생각해 본다고 하여도 오직 죽는 일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라고 장계를 올린 그였다. 장군은 다른 장수들에게 피하라고 명했다. 하지만 부하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장군의 곁에는 두 부하가 있었다. 비장 정연록과 관노 애남이었다. 장군의 뜻을 눈치 챈 이들은 말했다.
 
“공은 나라를 위하여 죽고 우리들은 공을 위하여 죽겠습니다.”
 
장군은 화약고를 둘러싼 섶에 불을 붙였다. 
 
본보에 연재 중인 ‘충장공 남이흥-비장한 순국’을 집필하고 있는 남균우 선생은 글 중에서 이 상황을 ‘화약고에 횃불로 불을 지르니 굉음과 함께 불길은 하늘을 뒤덮었다. 요란한 폭음과 함께 안주 관아(중영루)는 순식간에 불기둥으로 화하였다. 남이흥 이하 조선군은 물론 후금군 수천 명이 한꺼번에 폭사했다’고 간단히 썼다. 그러나 상상만으로도 그 광경은 실로 장렬했을 것이었다. 남이흥 장군의 죽음으로 ‘…비장한 순국’도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 집필자인 남균우 선생을 만났다. 남이흥 장군의 전기를 쓰게 된 동기, 이 시대에 장군을 불러낸 이유 등을 물어봤다.
 
 “문중에서 장군의 생애를 상세히 정리한 무언가가 있어야 겠다는 얘기가 나왔습니다. 소책자가 있었지만 그것으론 아쉬운 게 있었거든요. 문인 노릇을 하고 있으니 제가 맡게 됐지요. 하지만 직계 후손으로서 선조의 이야기를 쓰는 게 쑥스럽기도 해서 글 잘 쓰는 다른 분들에게 부탁했는데, 장군의 이야기를 알아보고는 다들 어렵겠다고 하더라구요. 후손이 이렇게 얘기하는 게 뭣하긴 한데, 이순신 장군에 버금할 만한 민족의 영웅이라 할 만 하거든요. 그때 광주의 ‘충민사(忠愍祠)’를 가봤는데, 전상의 장군만 모셔놓았더군요. 원래 안주에 있는 충민사는 안주성 싸움에서 순국한 이들을 모신 사당인데, 그걸 광주로 옮겼나 싶었는데 상관인 남이흥 장군이나 김준 장군이 없어요. 아무리 권력의 꼭대기에 있는 분의 조상분이라 해도 이건 아니다 싶었고, 나라도 남 장군의 이야기를 해야겠구나, 마음먹었지요.”
 
남이흥 장군은 이성무 교수가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31명의 명장’을 추려 쓴 ‘명장열전’, ‘조선의 명장’ 편에 실려 있다.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명장 중의 한 분이라는 얘기다. 게다가 적장인 아민도 “조선은 충의의 나라라더니 내 이제 그 참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고 그의 충성심을 추모했다. 감동한 아민은 패잔병을 혹독하게 다루는 부하들을 말리고, 포로들을 석방했다. 제목 그대로 ‘비장한 순국’을 한 민족의 영웅이 어떻게 이토록 알려지지 않은 걸까?
 
“아마 그 뒤의 역사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병자호란 때 인조는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찧는’ 항복을 하고 청나라와 군신(君臣) 관계를 맺게 되지요. 그러니 임금의 나라에 저항한 장군을 선양하고 후세들에게 가르치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겁니다. 사실 이순신 장군도 아는 사람들은 알고 있었지만 박정희 대통령 때 현충사를 새로 고치면서 선양하고 가르치면서 국민들 마음에 새겨진 것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민족의 영웅이라도 누군가 돌아보지 않으면 잊히는 건 금방입니다.”
 
남균우 선생은 글을 쓰기 위해 국회도서관을 뒤지고 각종 자료를 찾아 중국까지 다녀왔다. 사실 선생은 35년 교육 외길을 걸어온 교육자다. 당진의 북창초 교사를 시작으로 천의초, 서산여고 등 서산과 태안, 안면도 등지에서 교사 생활을 했다. 그의 호 ‘서계(西溪)’가 혹시 충남 서쪽을 뜻하는 게 아니냐 물었더니 웃는다. 그냥 집안 윗분이 지어준 거란다. ‘상사 눈에 들어 어떤 명예를 얻기 위함이 아니었기에 한 눈 팔지 않고 내 할 일 열심히 했다’는 선생은 교육자로 받은 상이 46개나 된다. 그런 선생이 역사를 찾고 정리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1998년 ‘시세계’에 ‘바위섬’으로 등단한 시인이자, 시조시인, 소설가이기도 하다. 교육자답게 그의 글은 주로 ‘자연’과 ‘교육’이 테마다. 동국대 4·19 기념비엔 그의 시 ‘동국인의 기상’이 새겨져 있다. ‘시간이 금’이라는 작품은 학생들에게 들려주는 그의 당부다.
 
 ‘시간은 금이란다 너는 지금 무엇하나/ 가며는 아니 오는 살 같은 오늘이요/ 내일이 있다 미룸은 낙오인의 지름길// 어제는 지났는데 남은 것 무엇인가/ 지난 어제 거울삼아/ 오늘을 보내거라/ 오르고 또 오르어서 희망봉에 이르자// 너 지금 하는 일에 박차를 가하여라/ 네가 이룬 참된 일이 거듭거듭 쌓이며는/ 하늘에 샛별이 되어 높이높이 뜨리라.’
 
다시 남이흥 장군으로 돌아가자. 본보가 ‘…비장한 순국’을 연재하기로 한 것은 장군을 모신 ‘충장사(忠壯祠)’가 당진에 있기 때문이다. 당진 대호지면 도이리에 충장사가 있음에도 충장사가 있는지, 누구를 모시는 곳인지조차 모르는 이가 많기 때문이었다. 장군이 태어난 곳이 비록 충청은 아니지만 충청민이 모시는 인물, 위인이 누구인지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해서였다.
 
충장사는 남이흥 장군뿐 아니라 장군의 아버지 남유(南瑜. 1552~1598) 장군을 기리는 사당이다. 남유 장군은 임진왜란의 노량해전에 이순신 장군과 함께 싸웠다. 이순신 장군이 적탄에 맞아 전사한 사흘 뒤 도망가는 왜군을 쫓아 격전을 치르다 적탄에 맞아 전사했다. 아버지와 아들, 2대가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적과 맞서 싸우다 장렬하게 순국했던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를 통틀어 2대가 무장으로서 나라를 지키다 순국한 것은 극히 드문 예다.
 
지금 남이흥 장군의 이야기가 갖는 의미는 어디에 있을까?
 
“나라사랑이지요.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살신성인하는 불굴의 정신, 국가관, 충성심을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국가관이 흔들릴 때가 나라의 진짜 위기라 할 수 있지요. 또 당했으면 다시는 당하지 않도록 대비를 단단히 해야 합니다. 정묘호란 뒤에 병자호란을 맞습니다. 태평한 시대에는 과거 아픔을 잊어버려요. 나라를 지키기 위한 장비를 가지고, 그게 다 국민이 모아준 돈인데, 장난치는 사람들을 보세요.”
 
남균우 선생은 ‘…비장한 순국’을 통해 위대한 장군이 있었고, 그를 모신 사당이 당진에 있음을 알아주었음을 하는 뜻을 감추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충장사를 기억하고 찾아준다면 장군도 하늘에서 기뻐하실 거라 했다. 선생은 남이흥 장군의 이야기가 새로 쓰는 국사교과서에 한 줄이라도 실렸으면 하는 생각으로 청원을 하고 있다.
 
“이괄의 난을 평정한 1등공신을 말할 때도 장만, 정충신만 나올 뿐 남이흥 장군은 없습니다. 이괄의 난 때 전세를 바꿔놓은 무악재 전투의 주인공이 장군인데도 말입니다. 더욱이 정묘호란 때 싸움이라고 할 수 있는 건 오직 안주성 싸움뿐입니다. 그럼에도 장군의 활약상이 검인정 교과서에도 단 한 줄도 소개돼 있지 않습니다. 후손된 사람으로 이건 아니다 싶고, 교육자의 입장에서도 아니다 싶습니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살신성인으로 실천한 충의정신은 자라나는 중고등학생들에게도 심어줘야 하겠다는 생각입니다. 많은 걸 원하는 게 아닙니다. 간략하게나마 기술되었으면 하는 거지요. 국사편찬위원회 위원들이 청원을 받아들여 주면 좋겠네요.”
 
 ‘…비장한 순국’은 요즘 남이흥 장군의 사후의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다. 정묘호란에서 패한 인조가 청나라와 형제의 맹약을 맺는 이야기가 뒤를 잇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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