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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40년 전 오늘, 8·18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당시 공동경비구역JSA에서 근무한 병사 전병호씨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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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6.08.17 16:23
  • 기자명 By. 장선화 기자
[충청신문=천안] 장선화 기자 =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오늘.
 
정확히 1976년 8월18일 오전 11시경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내 사천교(돌아오지 않는 다리) 인근에서 북한군에 의해 미군장교 2명이 살해당했다.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하던 유엔사 경비병들을 북한군 수십 명이 도끼와 곡괭이 등 흉기로 구타해 살해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름 하여 818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이다.
 
당시 공동경비구역JSA(Joint Security Area) 병사로 복무중 수명의 북한군에 둘러싸여 목숨을 건 사투 끝에 가까스로 귀환한 전병호(63) 씨.
 
전 씨는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위한 한국군 중대장 신변보호를 위해 동원된 사병이다.
 
천안시 신갈리에서 조그마한 구멍가게를 운영중인 전병호 씨를 만나 숨 가빴던 당시 기억을 되살려 본다. 
 
<편집자 주>
 
 
◆죽음의 문턱에서
 
갑자기 모든 것이 시야에서 사라지며 정신이 몽롱해졌다.
 
지난 일들이 마치 어제 일처럼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친다.
 
그리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정과 사랑을 나눴던 친구들.....
 
나는 고등학교 선생의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부모님 애간장을 뒤집어 놓기 일쑤였던 광풍노도의 사춘기를 공주에서 보낸다.
 
그리고 인천으로 유학을 떠났으나 공부는 뒷전으로 대학에 적을 둔 채 운동만 열심이다.
 
3년여에 걸친 경기도 대표 태권도 선수를 하면서 그런대로 철이 들어가고......
 
친구들은 어느새 제대와 예편을 눈앞에 두고 있다.
 
뒤늦은 나이에 군에 입대한 것이 엊그제만 같다.
 
◆악몽의 순간
 
 
아! 
 
이렇게 죽는 구나.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지려는 그 순간.
 
“야! 전병호, 다 죽여”, “그래 덤벼” 귀청을 찢을 듯 고성이 귓전을 때린다.
 
너무도 귀에 익은 목소리.
 
그는 다름 아닌 단 하나뿐인 자대배치 동기생 배(재복) 상병의 고함이었다.
 
합기도 6단인 배 상병의 죽음에 맞선, 극한의 공포와 악에 받힌 괴성에 얼핏 정신이 돌아온다.
 
누군가 주먹과 몽둥이 등으로 나를 두들겨 패고 있다.
 
그런데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전혀 아프거나 고통을 느낄 수 없었던 것이다.
 
순식간에 발생한 일방적 폭력에 대한 분노가 우선이었다.
 
혈기왕성한 20대 초반의 젊음과 패기가 죽음을 앞두고도 두려움을 전혀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도 잠시, 우선 살아야겠다는 본능이 어디선가 힘을 솟구치게 만들었다.
 
그리고 중대장을 지켜야 된다는 임무가 순간적으로 교차된다.
 
두들겨 맞으면서도 앞이 안 보이는 것은 쓰고 있던 헬멧 때문이란 생각이 불현 듯 떠오른다.
 
헬멧을 돌리면서 움켜잡은 손들을 뿌리치기 위해 온힘을 다했다.
 
순간 적들이 모두 떨어져 나간다.
 
◆군인의 책무
 
흩어져 도망치는 적들을 바라보며 어디서 그런 힘이 솟구쳐 나왔는지 스스로도 놀란다.
 
사위를 살피니 동료 배 상병이 저 앞에서 적군 5〜6명과 난투극을 벌이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동료를 구하기보다 중대장을 보호해야 된다는 책임감에 주위를 아무리 살펴도 눈에 띄지 않는다.
 
우선 동료부터 구하기로 하고 “덤벼, 죽여”란 기합과 힘껏 내달리니 이들 또한 뒷걸음을 친다.
 
동료 배 상병과 함께 중대장 김문환 대위를 찾았다.
 
저만치에 중대장이 보이는데 상한 곳이 없어 보인다.
 
우선 중대장을 보호하며 초소로 돌아온다.
 
그리고 중대장을 세심히 살펴봐도 별다른 충격은 없다. 
 
순간적으로 마음이 놓인다.
 
중대장 보호임무를 다했다는 책임감과 중압감에서 해방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부처님이 돌려준 생명
 
한숨 돌리는데 동료 배 상병이 “흡사 악귀와도 같다”며 “어디 다친데 없냐”고 묻는다.
 
그제야 몸을 돌아보니 온몸이 피투성이다.
 
몸싸움을 벌이는 사이 대검으로 등을 두 번씩이나 찔렸음을 알고는 온몸에 힘이 빠진다.
 
두 번 모두 천만다행으로 척추와 갈비뼈를 뚫지 못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거기에 도끼로 머리를 내리친 충격에 의해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었다. 
 
이 또한 부처님이 도왔는지 헬멧이 뒤틀리면서 목숨을 구해줬던 것이다.
 
온몸이 상처투성이로 피와 땀범벅이 됐음에도 전혀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만류를 뿌리치고 권총으로 재무장한 뒤 사투현장을 찾았으나 아무도 없다.
 
찰나에 불과한 몇 분간의 작전을 끝낸 적들은 흔적도 없이 모두가 사라진 것이다.
 
이것이 40년전 북한군에 의한 818 도끼만행사건의 전모다.
 
◆공동경비구역 도끼만행
 
이날 즉 1976년 8월 18일 오전 10시께.
 
‘돌아오지 않는 다리’ 남쪽 국제연합군측 제3초소 앞 시야를 가리는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실시한다.
 
미군 장교 2명과 사병 4명 및 한국군 장교 1명과 사병 2명 등 9명이 한국인 노무자 5명의 작업을 지휘·경호하고 있었다. 
 
오전 11시 사사건건 시비로 악명 높은 북한군 대좌 박철이 병력 30여명과 함께 작업중지를 요구한다.
 
그러나 미군 책임자 보니파스(Arthur G. Bonifas) 대위는 작업계속명령을 내린다.
 
순간 박철이 “죽여”라는 고함과 함께 느닷없이 보니파스 대위의 낭심을 군화발로 걷어찬다.
 
무방비상태에서 치명적 급소를 격타당한 보니파스 대위는 신음과 함께 앞으로 고꾸라진다.
 
이를 신호로 북한군은 들고 온 몽둥이와 노무자들의 도끼로 보니파스의 머리를 내리쳤다.
 
또 함께 있던 베렛(Mark T. Barrett) 중위도 몽둥이와 곡괭이 및 도끼 등으로 무차별 공격을 당한다.
 
트럭으로 동원된 수십명의 인민군 사병들의 무차별폭력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북한군에 의해 살해된 것이다.
 
◆미군장교에 경의를....
 
이날 미군장교 2명이 숨진 이외에도 한국군 중대장 1명과 전 씨 등 사병 2명이 난투 중에 다쳤다.
 
북한군은 아군을 4〜5명씩 에워싸고 미리 준비한 몽둥이 등으로 일방적인 폭행을 계획적으로 자행했던 것이다.
 
한국군중 북한군의 대검에 의해 두 번씩이나 찔린 전 씨의 상처가 가장 큰 피해였다.
 
미군 사병 4명은 난투 중에 재빨리 자리를 피해 큰 부상은 없었던 것으로 전한다.
 
당시 장교와 사병 등 공동경비구역 사건현장 남북한군인 모두는 실탄이 장전된 권총을 휴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용하지 못한 것은 양측 초소에서의 난사우려로 사용을 자제했을 뿐이다.
 
목숨이 경각에 달렸음에도 끝내 총을 사용하지 않은 미군장교에 경의를 표한다.
 
◆일촉즉발의 준 전시상태
 
미군장교 살인사건이 전파를 타면서 온 국민이 저들의 만행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에 치를 떨었다.
 
그리고 한반도는 순식간에 일촉즉발의 전쟁위험에 휩싸인다.
 
당시 미군은 물론 한국군 등 전군이 준 전시상태로 돌입한 것이다.
 
주한미군 사령관 리처드 스틸웰이 데프콘3(예비경계태세)를 발동해 공격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로부터 3일 후인 21일 미 2사단 병력과 한국군 제1공수특전단을 중심으로 구성된 ‘폴 번연(Paul Bunyan)작전’이 전개된다. 
 
오전 6시 4분께 이들 특수임무부대가 공동경비구역으로 들어가 7시 40분 공병들에 의해 미루나무를 절단한다.
 
미루나무 때문에 발생한 북한군의 미군장교 2명에 대한 테러인 도끼만행사건이 이렇게 막을 내린다.
 
 
◆도끼만행자의 최후
 
그리고 8년 후인 1984년 악명을 떨쳐온 북한군 대좌 박철은 판문점에서 소련 외교관의 한국망명사건 당시 유엔군과의 교전 중 숨진 것으로 전해진다.
 
 
◆도끼만행 후유증
 
40년전 이날의 기억이 지금도 어제 일같이 생생하다는 전병호(도끼만행사건당시 상병)씨는 “40년의 세월이 흐른 작금까지도 그날의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며 심각한 후유증을 호소한다.
 
이날의 정신적 충격에서 벗어나려고 하면할수록 더욱 극심한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져 버린다는 것.
 
날이면 날마다 술에 절어있어 가까스로 잡은 직장도 2개월 이상 계속해본 적이 없다.
 
최근에는 자꾸만 예전에 거절한 일이 생각난다.
 
도끼만행사건 직후 미국 육군사령관 존스텔 장군(대장)이 “미국육군 태권도교관이 돼 달라”고 한 것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날의 공로를 인정받아 미국육군으로부터 공로훈장을 받았을 뿐이다.
 
못난 놈, 그때 따라 나섰어야 했는데.....
 
생각할수록 후회막급이다.
 
미국 육군으로부터 공로훈장을 받은데 비해 우리정부로부터는 그 무엇도 받아본 사실이 없다.
 
매년 8ㆍ18행사 때는 초청을 받아 빼놓지 않고 참석한다.
 
그러나 거마비 등 일체의 행사참석 비용 지원은 없다.
 
초대받은 우리들이 사비로 행사에 참가할 뿐이다.
 
◆상이등급 등 정부 보상
 
사건발생 40여년이 지난 2015년 후반기에 상이 7등급을 인정받았다.
 
국방의 의무를 위한 아수라현장에서 죽다 살아온 보상이 월 50만원의 연금인 것이다.
 
그것도 북한군 대검으로 두 번이나 찔린데 따른 보상일 뿐이다.
 
당시 유일하게 생사를 함께했던 동기 배 상병은 흉기에 찔린 자국 등 흉터가 없다는 이유로 제외됐다.
 
정부는 육체적으로 표시가 나는 것만을 인정하고 정신적 피해는 애써 외면하고 있다.
 
전 씨는 이는 마치 위안부 할머니에 대한 잘못이 없다는 일본의 주장과 흡사한 모양새라며 입을 닫았다.
 
대담=임재권 국장
정리=장선화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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