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시각] 프로스트 vs 닉슨
[데스크 시각] 프로스트 vs 닉슨
  • 충청신문 dailycc@dailycc.net
  • 승인 2016.12.08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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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순택 논설실장
▲ 안 순 택 논설실장
[충청신문=안순택 논설실장] “대통령이 하면 불법적인 일도 불법이 아니라는 겁니다.”
 
뜬금없이 웬 전 근대적인 소리냐구요? 지금 진행 중인 청문회 증인석에 앉은 사람들, 청와대에 계신 분, 그들의 말의 행간에서 들리는 소리 같지 않습니까? 이 말은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이 한 말입니다. 영화에선 반전으로 이끄는 결정적 포인트 대사이기도 하구요.
 
론 하워드 감독의 2008년 영화 ‘프로스트 vs 닉슨’이 요즘 핫하게 뜨고 있답니다. 1977년 이뤄졌던 토크쇼 MC 프로스트와 닉슨 전 대통령의 세기적 인터뷰를 그린 영화지요. 당시 네 번에 걸친 인터뷰는 4000만 명이 넘는 인구가 시청한 최고의 방송 이벤트였습니다.
 
실화를 스크린에 옮긴, 지루할 것 같은 이 영화가 새삼 관심을 받는 건 사임한 대통령의 이야기가 우리 현실과 너무도 닮아 있기 때문일 겁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듣고 싶은 이야기를 들려주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1974년 8월 미국 정치사상 가장 큰 스캔들이었던 워터게이트 도청 사건으로 사임했던 닉슨 대통령은 백악관을 떠나면서 아무런 진실을 밝히지 않았고,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지도 않았습니다. 프로스트는 닉슨에게서 잘못에 대한 인정과 사과를 받아내려 하지요.
 
그러나 닉슨은 노회한 정치가였습니다. 닉슨은 번번이 프로스트를 ‘녹아웃’시켜버립니다. 닉슨이 인터뷰에 응한 건 인터뷰가 정치적 재기의 발판이 되리라 여겨서였습니다. 인터뷰는 닉슨의 의도대로 진행됩니다. 2시간으로 정해진 한 회 분량의 인터뷰는 닉슨의 현란한 말솜씨로 채워집니다. 자신을 포장하고, 잘못된 일은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고…. 시청자들이 원한 건 진실이었지만 닉슨의 치적을 선전하는 장이 돼버립니다.
 
그러나 한방. “좋습니다. 만약 홀드먼과 얼리크먼의 주도로 일어난 일이라면 당신이 그 일(워터게이트 도청사건)을 알게 된 후에는 왜 체포와 수사를 지시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또 다른 진실 은폐 아닙니까?”
 
이 질문에 닉슨은 호흡이 가빠집니다. 그렇게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 싫었던 닉슨은, 이 글 맨 앞의, 대통령의 불법은 불법이 아니라는 말을 내뱉고서야 무너지고 맙니다.
  
프로스트는 몰아칩니다.
 
“미국 국민이 당신으로부터 듣고 싶어 하는 말이 세 가지 있습니다. 첫째 나는 범죄행위를 저질렀습니다, 둘째 나는 대통령으로서 직권을 남용했습니다, 셋째 나는 국민들을 2년 동안 한없는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그것에 대해 사과합니다, 라는 말입니다.”
 
닉슨의 눈이 떨립니다. 그리고 토해냅니다.
 
“나는 국민들을 좌절케 했습니다. 내 친구들을 실망시켰습니다. 나는 국가를 수렁에 빠뜨렸습니다. 무엇보다 최악인 것은 정부의 시스템을 망친 일입니다. 정부를 위해 일해야 하는 청년들에게 절망을 안긴 일입니다. 젊은이들은 지금 정부가 썩어빠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 국민들에게 실망을 안겼습니다. 저는 남은 인생동안 그 모든 짐들을 짊어져야 합니다. 내 정치적 생명은 끝났습니다.”
 
지금 우리가 누군가로부터 가장 듣고 싶은 이야기 아닙니까?
 
오늘 무슨 이야기를 해도 귀에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눈과 귀는 바짝 날이 서 국회를 향하고 있습니다. 과연 탄핵이 될까요, 부결될까요. 대통령에겐 ‘운명의 날’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국민은 이미 대통령을 탄핵했습니다.
 
대통령은 탄핵이 되더라도 헌재의 결정을 기다리며 담담하게 가겠답니다. 기어코 국민과 대결하겠다면 끝까지 가봅시다. 프로스트처럼 묻고 또 물읍시다. “우리는 당신의 진심어린 사과를 듣고 싶습니다.” 
 
지난 데스크시각 ‘고목과 나목’에서 나무가 낙엽을 털어내듯 모든 걸 훌훌 털어버리고 새로 시작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에겐 기회가 있었습니다. 세월호 때입니다. 그때 온갖 비정상을 정상으로 돌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를 놓쳤으니 지금, 오늘 그걸 해야 합니다.
 
배가 엎어져야 헤엄치는 걸 배운다고 합니다. 바람이 거세야 굳센 풀의 힘을 안다고 합니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새로운 길이 나올 때까지 거침없이 가봅시다. 그래야 살 만한 세상이 오지 않겠습니까. 그러자고 촛불을 손에 든 거 아니겠습니까. 
 
‘겨울이 가면 봄은 멀지 않으리’란 샐리의 시 한 구절이 유난히 선명한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