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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속으로] 모래 위에 새기는 글

이혜숙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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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7.02.12 02:40
  • 기자명 By. 충청신문
살다보면 뜻밖의 일들이 벌어진다. 나에게는 절대 그럴 일이 생기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일이 일어났다. 너무 어이없어서 믿고 싶지 않았지만 다가온 현실 앞에 나는 이성을 잃었다.

서울로 가서 딸하고 지내다가 남편하고 며칠 지내려고 대천으로 차를 몰았다. 다음날 유람선으로 가려는데 점심시간 지나서 오라는 남편의 전화다. 무슨 안 좋은 일이 있는 것을 직감했지만 사소한 문제는 모른 체 넘어가려고 숙소에 누워있었다.

몇 시간 후 직원한테서 전화가 왔다. 선장님 다쳤으니 병원에 가자고 한다.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부랴부랴 채비를 서둘렀다. 직원과 함께 온 남편의 코에서 피가 멈추질 않고 흐른다.

코를 보니 이상했다. 누구한테 맞았느냐고 하니까 처음엔 말을 않다가 내 표정을 보자 숨길 수 없었는지 자초지종을 말하기 시작했다. 날씨가 추워지기 전에 청소를 한다고 서두르니 두 사람의 직원이 추운데 왜 청소를 하느냐며 화를 내며 고함을 질렀단다. 그럼 내가 혼자 할 테니 당신들은 당신 일이나 하라고 하고 청소를 마쳤단다.

상식 이하의 생각을 하는 사람하고 같이 있기 싫어서 식사를 하러 가지 않았단다. 회사 대표가 왜 선장님은 왜 안 오느냐고 물으니 자기하고 싸웠다고 하더란다. 왜 자기 책임을 다하는 선장님한테 그러느냐고 했더니 숟가락을 내 던지며 조타실에 있는 남편에게 와서 행패를 부렸다고 한다. 자기의 잘못을 대표에게 고자질 했다고 생각했단다.

어이없이 당하고 대표에게 가서 이야기 하자고 해서 가는데 대표를 보자마자 주먹을 휘둘러서 남편이 말렸단다. 그랬더니 느닷없이 남편의 멱살을 잡고 박치기를 하더란다. 가해자는 대표의 형이다.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으니 코뼈가 부러졌다고 큰 병원에 가서 수술하라고 한다. 다혈질인 나는 화가 머리꼭대기까지 뻗쳐서 고소하겠다고 난리를 쳤다. 대표나 간부들은 미안하다고 하고 무어라 할 말이 없다고 했다. 그 사람은 일하기 싫으면 집에서 쉬면 될 것을 왜 회사에 나오는 걸까.

나라면 모를까 남편은 평생 남에게 욕 한 번 하지 않고 남에게 피해주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 사람이다. 사건이 터진 후 대표 부부는 죄송하고 미안하다는 문자와 전화가 빗발치는데, 인면수심의 가해자는 물론 옆에서 그 광경을 지켜본 가해자 가족도 미안하다는 전화 한통도 없다. 잘못인 뭔지도 모르는 사람인가 보다.

집으로 와서 보름정도 치료를 마치고 고소장을 작성해서 가해자 딸에게 주었다. 고소장을 가해자에게 전해주라고 하면서 공소시효 안에 내 기분에 따라 접수할 수도 안 할 수도 있으니 참고하라고 했다. 그제야 죄송하다는 그의 딸에게 엄포를 놓고 돌아서 나왔다. 부모가 그 모양인데 자식이 무엇을 보고 배웠을까 싶다.

‘친구 두 사람이 사막을 걷고 있었다. 힘들고 지치자 한 사람이 친구의 뺨을 때렸다. 뺨을 맞은 친구는 모래 위에 “친구가 내 뺨을 때렸다”라고 썼다. 다시 길을 가다가 뺨 맞은 친구가 오아시스에 빠지게 되었다. 그때 때린 친구가 손을 내밀어 뺨 맞은 친구를 구해주었다. 맞은 친구가 이번에는 돌에 “내 친구가 나를 구해주었다”라고 썼다. 때린 친구가 궁금해서 물었다. 내가 때릴 때는 모래 위에 글을 새기더니 구해 주었을 때는 왜 돌에 새기느냐고 했더니 나쁜 마음을 모래에 새기면 바람이 불어와 글이 사라지지만 돌에 새기면 영원히 남아 있지 않느냐고. 원수는 물에 새기고 은혜는 돌에 새기라는 말이다.

마음이 어진 남편은 그냥 넘기려고 했지만, 다혈질인 나는 자다가도 화가 나서 벌떡 일어나기를 몇 날 몇 밤을 했다. 화가 나는 마음에 돌에 새기고 싶은 글을 모래에 새기느라 안간힘을 썼다.

기본 도리가 뭔지 모르고 사는 사람이 많은 세상 같다. 이런 세상에 싸우는 게 맞는 건지 용서하고 넘기는 게 옳은 건지 헷갈린다. 부처님 법대로라면 전생의 업의 소치라고 넘겨야 하겠지만 아직 덜 떨어진 불자는 화를 삭이지 못하고 있다.

“너는 아주 나쁜 사람이다.” 억지로 모래 위에 글을 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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