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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시각] 문 대통령과 부채 철학

안순택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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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7.06.08 17:12
  • 기자명 By. 충청신문
 
[충청신문=안순택 논설실장] 더위가 더끔더끔 열기를 더해가는데 삽상한 바람이 짜증나는 열기를 식혀줍니다. 
 
청와대발 바람입니다. 눈높이를 맞춘다, 함께 걷고 싶어 하고 얘기하고 나누려 한다, 문재인 대통령의 파격적인 소통 행보는 기자가 보기에도 감탄이 나올 만큼 삽상했습니다.
 
출근길 시민들과의 인증샷, 청와대 참모진과 오찬을 한 뒤 커피를 들고 청와대 경내를 산책하는 모습은 산뜻했습니다. 특히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추모사를 마친 유족 김소형 씨를 안아주는 장면은 가슴이 찡했지요.
기자 입장에서 보자면 가장 인상적인 건 김이수 헌법재판소장 후보자 지명을 직접 발표한 뒤 청와대 출입기자들에게 던진 말입니다.
 
“혹시 질문 있습니까?”
 
애초 문 대통령과의 질의응답은 없다고 공지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대통령이 질문이 있느냐고 물었으니 당연히 질의응답이 없을 줄 알았던 청와대 관계자뿐 아니라 참석한 기자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답니다.
 
이날 더 쌈박했던 건 비표를 가진 기자들만 회견장에 참석할 수 있던 관례를 깨버렸다는 겁니다. 그동안 VIP의 회견장은 신원 검증을 마친 정식 비표가 있는 기자들만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날은 임시 출입 비표인 방문증을 가진 기자들도 참석을 허용해 오히려 정식 비표를 가진 기자들이 회견장에서 자리를 찾지 못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대통령 행사 때면 경호 문제로 휴대전화 등 무선통신을 차단합니다만 이날은 그것도 차단하지 않았습니다. 그게 정상 아니겠습니까.
 
여야 5당 원내대표를 청와대 상춘재로 초청해 만날 때의 모습도 삽상했습니다. 대통령이 상춘재 바깥에 마련된 티테이블에 먼저 나와 5당 원내대표를 맞이한 것이며, 이름표를 달지 않도록 격식을 파괴한 건 앞으로 협치를 위한 손 내밀기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눈길을 끄는 건 둥근 원탁입니다. 그깟 원탁이 뭐라고? 하고 생각할 게 결코 아닙니다.
 
1960년대 일본 도쿄의 위성도시에 불과했던 요코하마를 일본 제2의 도시, 아니 세계적인 도시로 도약하게 만든 주인공은 다무라 아키라라는 사람입니다. 그가 기획조정국장에 올라 가장 먼저 한 일이 서열 중심의 권위적인 책상 위치를 바꾸는 거였답니다. 사무실 가운데 원탁을 두고 전 직원이 언제든 모여 논의하고 토론할 수 있는 구조로 바꿔놓은 게 요코하마 도시 혁신의 첫 걸음이었습니다.
 
“그깟 하찮은 책상 위치 바꾸기 때문에? 에이 설마~!” 하고 믿기지 않겠지만, 그 작은 실천이 요코하마 재탄생의 기폭제가 되었다는 건 국제사회에도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세상을 온전히 바꾸는 일에는 크고 강력한 정책이나 많은 양과 돈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근본을 바꿀 수 있다면 그것이 혁신의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삽상한 바람 하면 빠뜨릴 수 없는 게 부채입니다. 그러고 보니 지난달 30일이 부채를 선물하던 단오였네요. 우리 선조들은 1년에 두 번 선물을 주고받았습니다. 동짓날의 달력과 단오날의 부채였지요. 아직 부채를 선물하지 못했다고 실망할 건 없습니다. 올해 음력 5월은 윤달이지요. 억지스럽긴 하지만 오는 28일도 단오입니다. 6월 내내 선물해도 되겠지요.
 
부채는 손으로 부쳐 바람을 일으킨다는 뜻의 ‘부’와 대나무로 만든 도구라는 뜻의 ‘채’가 어우러진 우리말입니다. 선풍기니 에어컨이니 뭐니 해도 부채가 우리에게 훨씬 정겹게 다가 옵니다. 선풍기 바람이 더위를 물리적으로 쫓고, 에어컨 바람이 더위를 화학적으로 식힌다면 부채 바람은 더위를 달래면서 공존하는 바람입니다. 자연과 적대하는 바람이 아니라 화합하는 바람이 부채의 묘미이자 철학입니다.
 
청와대발 삽상한 바람이 내내 일렁이길 바랍니다. 그럴려면 부채에서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대통령에게 자연이 뭐겠습니까. 국민이지요. 자연과 화합하듯이 무엇보다 국민이 원하는 걸 하는 겁니다. 마음부터 사야 할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우선은 관행이니 관례니 하는 미명 아래 첩첩 쌓아 놓은 특혜부터 무너뜨리는 겁니다. 적폐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부채는 급히 흔들면 찢어지거나 부서집니다. 급하게 하려 서두르지 마십시오. 틀만 마련해도 성공입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정의로운 틀 말입니다. 부채를 만들 땐 틀부터 짜지요. 천천히 가야 천리를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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