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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시각] 윌리엄 F. 딘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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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7.06.22 19:39
  • 기자명 By. 충청신문
[충청신문=안순택 논설실장]문용덕 시인은 ‘대전문학’ 30호에 쓴 ‘6·25와 딘 장군’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대한민국 사람은 물론 대전 사람이라면 미 제24사단장 소장 윌리엄 F. 딘 장군(William F. Dean)을 몰라서는 안 된다.”

왜 그럴까요? 문 시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흔히 한국전쟁하면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 맥아더 장군은 알지만, 딘 장군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안다 해도 ‘대전전투에서 포로가 된 미 제24사단장’ 정도로만 안다. 그러나 딘 장군은 6·25 한국전쟁에 제일 먼저 달려와 대한민국을 누란의 위기에서 구해낸 은인이다. 1947년 한국의 군정장관으로 임명되어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기초를 닦는데 공헌했을 뿐 아니라….”

6·25 전쟁 초기 가장 치열했던 전투가 벌어진 전장이 대전입니다. 시내가 온통 폐허로 변한 대전전투의 한가운데에 딘 소장이 있습니다.

딘 소장은 북한군의 남침 소식을 일본 큐슈에서 듣습니다. 그는 미국 의회의 승인도 받지 않고 7월 1일 보병 406명으로 선발대를 편성해 한국으로 보내고, 이틀 뒤 그 또한 본대를 이끌고 대전비행장으로 날아옵니다.

그는 왜 아시아의 작은 나라 한국을 그토록 지키려 했던 걸까요. 문 시인은 김희덕 소령의 증언을 빌려 까닭을 들려줍니다. 김 소령은 그때 교육차 미 24사단에 있었습니다.

“북한군이 남침하게 된 사태는 전적으로 한국 군정장관이었던 내게 책임이 있습니다. 미국의 정책상 한국군을 전차와 대전차포로 무장시키지 못했고 병력을 더 증강시켰어야 했는데 사령부에서 허락하지 않아서 못했으므로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 나는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나의 책임상 한국에 가서 침략자를 물리쳐야 하겠습니다.… 김 소령도 빨리 귀국해서 우리 함께 싸웁시다, 하면서 나에게 45구경 권총 한 자루를 주었다.”

하지만 스미스 부대는 오산 죽미령 전투에서 무너져 버렸고, 다시 보강해 투입된 34연대까지도 천안에서 퇴각합니다. 지금의 세종시 전의면 개미고개에선 수많은 전사자를 내고 맙니다. 잇달아 비보를 접한 딘 소장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그는 회고록 ‘제네럴 딘스 스토리(General Dean's Story)’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한국군들이 수천 명씩 무리 지어 마냥 남으로 내려올 뿐, 머물러서 싸우려 하지 않았다. 한국사령부의 말에 따르면 적 전차를 막을 방법이 없으며, 포병 지원도 없어 싸울 수가 없다는 것이다.”

대전차포, 3.5인치 로켓포를 보급 받은 그는 갑천에 방어진을 구축하고 북한군 탱크와 맞섭니다. 마침내 방어진이 무너지자 로켓포를 직접 들고 탱크 사냥에 나섭니다. 지금의 서대전네거리에서 탱크를 잡아버립니다.

아마 그는 가장 급한 일이 한국군의 사기를 회복시켜 재정비하는 것이라 생각했을 겁니다. 그러자면 무엇보다 제일 두려워하는 적 전차를 깨부술 수 있다는 것을 직접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법합니다. 그는 그가 로켓포를 든 이유를 이렇게 회고합니다.

“첫째, 제34연대 전투원의 사기를 고무시키고, 둘째 한국군 지휘관들에게 지휘의 도를 보여주고 아울러 한국군 부대의 전의를 돋우며, 셋째 북한군의 전투 방식을 직접 보고 대응책을 강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무에 너무 접근한 탓으로 숲을 볼 수 없었다.”

북한군에 밀려 후퇴했으므로 대전전투는 패전으로 보는 시선이 있습니다. 그러나 딘 소장은 사령부가 요구한 이틀 간 대전을 지켜냈습니다. 임무를 완수한 거지요. 이 시간 연합군은 낙동강 전선을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그때 낙동강 전선이 구축되지 않았다면 부산까지도 적의 수중에 넘어갈 수 있었을 것이니 참으로 아찔합니다. 인천상륙작전도 없었을 겁니다. 전황을 뒤집는 도화선이 됐으니 대전전투는 승리로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딘 소장의 용기는 무엇보다 한국인이 미국에 대해 신뢰를 갖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작은 나라 한국을 꼭 지키겠다는 미국의 결의를 보여준 게 대전전투였다고 생각합니다.

보문산 보훈공원에는 ‘대전지구 전적비’가 서있습니다. 딘 소장이 로켓포로 전차를 겨누는 조형물이 그날의 처절했던 장면을 실감하게 합니다. 오는 25일 보문산으로 딘 소장을 만나러 가면 어떨까요.

그는 부상 당한 부하 장병이 물을 찾자 계곡으로 물을 뜨러 내려가다가 미끄러져 정신을 잃었습니다. 그렇게 부대와 떨어져 외톨이가 됐고 산천을 헤매다 한 한국인의 밀고로 포로가 됩니다. 전쟁이 끝난 뒤 밀고자는 처벌을 받게 되는데, 밀고자의 감형을 탄원하기도 했습니다. 이만한 대인배 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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