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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시각] 비 이야기

안순택 논설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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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7.07.06 17:46
  • 기자명 By. 충청신문
 
[충청신문=안순택 논설 실장] 달갑잖은 손님이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데, 마침 비가 내립니다. 집주인이 한마디 하죠. “이젠 가라고 가랑비가 오시네.” 하지만 갈 생각 없는 얼굴 두꺼운 손님, 냉큼 받아칩니다. “더 있으라고 이슬비가 오는구먼.”
참 얄궂습니다. 가랑비일까요. 이슬비일까요. 가랑비는 가늘게 조금씩 내리는 비로 가는비를 뜻하는 우리말입니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고 하지요. 젖는 줄도 모를 정도로 가는비, 잔비를 말합니다. 이슬비도 나뭇잎에 이슬이 겨우 맺힐 정도로 가벼운 비죠.
 
가수 우순실은 “안개비가 하얗게 내리던 밤”(잃어버린 우산)이라고 노래합니다. 이름만 들으면 안개처럼 눈에 보이지 않게 내리는 비 같습니다. 안개비는 실은 가랑비입니다. 안개의 우리 오래된 옛말이 ‘가랑’이거든요.
 
가랑비 알갱이가 보슬보슬 끊어져 조용히 내리면 보슬비요, 부슬비요, 가루처럼 포슬포슬 내리면 가루비지요. 이슬비는 가랑비보다 수줍게 내린다 해서 새색시비라고 하고요.
 
가장 약하게 내리는 비는 ‘는개’입니다. 충청도 사투리로 ‘곰배턱’이라 하는 는개는 ‘늘어진 안개’라는 어구가 줄어든 말인데, 비라고 하기가 뭣해서 안개 쪽에다 붙여 놓은 이름입니다. 는개처럼 비라고 하기가 뭣해서 비라고 하지 않은 것이 또 있는데, ‘먼지잼’입니다.
 
먼지잼은 아주 조금 오다 마는 비지요. ‘떠도는 먼지를 땅으로 데려와 잠재운다’는 뜻의 풀이를 그대로 줄여 만든 말입니다.
땅 위의 목숨이 모두 그렇듯 우리 겨레도 죽살이를 비에 걸고 살았지요. 농사짓느라 하늘을 자주 보아선지 선조들은 비에 관한 한 박사였습니다. 내리는 모습이나 많고 적음, 주변 환경, 날씨에 따라 비의 이름이 수십 가지가 넘습니다. 
 
굵은 쪽으로 가볼까요. 빗발이 보이도록 내리는 비가 발비입니다. 굵고 세차게 퍼붓는 비는 작달비, 빗줄기가 장대처럼 굵으면 장대비, 땅을 다지는 달구처럼 아주 굵고 짓누르듯 내리는 비는 달구비요, 퍼붓는 비는 억수입니다. 한꺼번에 쏟아지는 호우는 ‘큰비’인데, 요즘 말로 집중호우라 부르는 비는 ‘모다기비’랍니다. 
 
계속 올 것처럼 좍좍 내리다 그치는 ‘웃비’, 홍수 진 뒤 한동안 멎었다가 다시 내려 진흙을 씻어주는 ‘개부심’도 있지요. 햇볕 속에 잠깐 오다 그치는 ‘호랑이 장가가는’ 비는 여우비요, 갑자기 세차게 쏟아지다가 그치는 비는 소나기입니다. 여름 소나기는 황소 등어리를 다툰다는데,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서 한 줄기씩 내리는 소나기가 ‘산돌림’입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별로도 비의 이름이 다릅니다. 농사일이 시작되는 봄철엔 할 일이 많다 해서 일비, 농사일 뒤끝에 내리는 여름비는 잠이나 자라는 잠비입니다. 추수철에 내리는 가을비는 떡이나 해드시라 떡비요, 겨울 농한기에 내리는 비는 술이나 드시라 술비입니다. 모종철에 오는 모종비, 모내기철에 내리는 목비는 꿀비요, 약비입니다. 봄비는 풍년농사의 밑천이 되기에 쌀비요, 가뭄을 해갈해주는 고마운 비는 단비입니다. 이런 복비만 있으면 오죽 좋으랴마는 우중충한 날씨가 계속되면서 내리는 오란비도 있습니다.
 
이 오란비가 장맛비입니다. 비가 우리말이듯이 장마도 순수한 우리말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은 장마를 ‘임우(霖雨)’라고 적고 있는데 ‘훈몽자회(訓蒙字會)’는 이를 ‘댜ㅇ 맣’로 해석을 달았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장마가 됐겠죠. ‘맣’은 물의 옛말로 비를 뜻합니다.
 
장마도 여럿입니다. 장마철인데 비가 적게 오거나 갠 날이 계속되는 장마는 마른장마이고, 초여름 보리수확을 할 때 오는 장마를 북한 사람들은 보리장마라 하죠. 거름이 되는 좋은 장마는 개똥장마요, 초가을에 비가 오다 금방 개다 하는 장마는 건들장마랍니다.
 
장마가 시작됐습니다. 호우특보가 발령되고 지역 곳곳이 물에 잠겼습니다. 시작은 요란한데 올 장마는 마른장마라는 게 기상청의 예보입니다. 마른장마라는 말은 ‘비 오는 달밤’이나 ‘월남 스키부대’ 만큼이나 어울리지 않는 난센스인데, 어쩌겠습니까. 자연이 하는 일인 걸. 오는 비 아껴 쓰고 돌려써서 가뭄 피해가 더는 없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때를 알고 때에 맞춰 내리는 비를 시인 두보는 ‘호우지시절(好雨知時節)’이라 했습니다. 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린다는 거죠. 어디 비만 그렇겠습니까. 사람도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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