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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여름 별꽃이 내려왔던 그곳은

변정순 음성수필문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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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7.07.11 17:41
  • 기자명 By. 충청신문
▲ 변정순 음성수필문학회 회장
[충청신문=변정순 음성수필문학회 회장] “도라지 도라지 백도라지 심심(深深) 산천(山川)에 백도라지, 한 두 뿌리만 캐어도 대바구니 철철철 다 넘는다. 에헤요 에헤요 에헤요 에야라 난다 지화자 좋다 얼씨구 좋구나 내 사랑아”
 
자연 속에 자족하는 삶과 사랑을 노래하고 있는 우리의 민요, 가사는 풍족하고 사랑이 넘쳐나는데 음률은 왜 이다지도 한없이 서글프게 들리는지 모를 일이다. 
 
여름 꽃 백 도라지꽃이 피었다. 장맛비가 멈추면서 그 사이 태양이 내려쬐이고 있는 틈을 타 도라지는 풍선처럼 부풀은 꽃망울을 터트리며 별꽃을 피웠다. 
 
키가 한길쯤 자란 하얀 도라지꽃 속에 드물게 자주 꽃도 석 박아 피어 눈을 즐겁게 해준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분홍색 비슷한 도라지 꽃 한 송이가 흰색도 보라색도 아닌 모습이 부끄러운지 얼굴에 홍조를 띠고 있다. 꼭 할머니 모습 같아 내 마음속에 깊게 숨은 그리움이 솟구치고 있다. 
 
생전에 할머니는 도라지 밭을 자주 매셨다. 영천태에 있는 도라지 밭은 오가는 길이 십리길이나 되니 아침에 밭에 한번 나가시면 저녁때가 되어야 집에 들어오시어 어머니와 함께 참과 점심을 내다 드릴 때가 많았다. 
 
어린소녀는 어머니를 따라 산골길을 걷는 것을 좋아했다. 여름 산에서는 알토로 노래하는 뻐꾸기와 쓰름매미의 소프라노가 완전한 이중창 하모니를 구사하는 성악 길을 걷는 것과, 노란 원추리 꽃과 눈 맞추고 그 곁에 빨갛게 익은 멍석딸기 따먹으면서 그냥 꾸미지 않은 자연 속을 걷는 것을. 여름이기에 더욱 좋았다.
 
그곳, 하얀 도라지 밭은 밤새별이 떨어져 만들어진 별 밭 같았고 밭 한 가운데에 홑적삼만 입고 밭고랑을 매는 할머니는 별이 떨어져 움직이는 모습 같았다. 
 
어머니는 “어쩌면 너희 할머니는 엉덩이에 흙 하나를 묻히지 않고 밭을 매신 다냐” 하시곤 고개를 내 저으셨다. 
 
할머니는 꼿꼿한 성격에 깔끔하긴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만큼 집안살림살이 정돈과 당신 방에 먼지 한 톨 없이 살았다. 
 
농사일이 많아 흙과 살고 있는 어머니는 얼마나 힘드셨을까. 
 
농사짓는 분이 자신의 속옷도 매일 삶아 입으시고 여름한낮에는 시원한 뒷마루에 앉아 홑이불과 모시저고리에 밀가루 풀을 먹였다. 
 
할머니의 수고로 여름밤 잠자리는 늘 사각거리는 홑이불을 덮을 수가 있었다. 어쩌다 어린 손녀가 봉숭아물을 들이는 날은 손가락을 묶었던 아주까리 이파리 매듭이 빠져 풀 먹인 광목이불 군데군데 빨간 천연염색을 들여 놓을 때도 있었지만 말이다.
 
나는 홑이불 속에서 많은 꿈을 꾸고 할머니께 많은 이야기를 들으며 잠을 잤다. 그 중 섬뜩한 이야기도 있다. 
 
6·25 난리가 일어났을 때란다. 북한군이 내려와 후퇴하면서 우리 마을에서 머문 적이 있었는데 그들은 총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할머니에게 겨누지 않고 배가 너무 고프니 밥을 달라고 하였단다. 
 
우리 집에 묵는 동안 아들또래인 듯 한 그들이 너무나 불쌍해 보여 며칠 동안 감자와 국수 같은 것으로 끼니를 해 먹여서 보냈다고 한다. 
 
할머니도 내심 그들이 무서워서 무척 불안했지만 그들이 그냥 갔으니 고맙다고 했다. 어린 나는 “그냥 갔으니 다행이다. 후”하고 한 숨을 내쉬곤 정말 꿈같은 실화로 오싹한 여름밤을 보내기도 했다. 
 
그야말로 심심산천인 우리 마을은 인민군들도 숨어있기 딱 좋은 곳 이었나보다. 
 
지금은 여름별꽃 밭과 내가 걷던 들길, 인민군이 잠시 머물러 간곳, 모깃불 연기 따라 밤하늘에 별을 세었던 멍석 깔린 마당, 하나도 잃어버려선 안 될 이야기들도 고스란히 아주 큰 저수지가 꿀꺽 삼켜 버렸다. 
 
지금은 저수지 주변에 임도도 만들어져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 낚시꾼들의 명소가 된 광활한 저수지로 변했다. 
 
졸지에 실향민이 되어 이제는 바라 볼 수만 있는 그 곳을 보며 연민과 추억과 그리움과 향수가 살아갈수록 뭉게뭉게 피어난다.
 
그 시절 나라에서 하는 일을 누가 당할 재간이 있었겠는가. 보상금 줄 테니 고향을 떠나라고 외치는 나랏일 하는 그 사람들에게는 마을사람들의 한숨소리와 눈물 콧물 훌쩍이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으리라. 
 
어쩔 수 없이 살 곳을 향해 떠나가는 마을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 다시 새 터전을 일구느라 수 십 년을 잊고 지내는 사람들도 있다. 
 
고향이 그리워 하나둘 모여 일 년에 한번 보고 싶은 이웃을 볼 수 있도록 여름 별꽃이 내려왔던 그곳에서 군자리마을모임을 갖긴 하지만 가슴이 먹먹하게 아려온다.
 
여름별꽃이 내려왔던 그곳은 할머니와의 추억이 가득 담겨있는 곳, 나의 모태다. 무척이도 더운 여름날, 할머니는 여름 별꽃으로 피어났고 그래서 백도라지 꽃이 피는 여름이면 서글픈 그리움에 목이 메어온다. 
 
장맛비로 찐득하고 더운 날, 오늘도 소낙비가 한차례 올 모양인데 뒤뜰에 별꽃은 여전히 빛나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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