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신문=이혜숙 수필가] 스승의 날 행사를 가졌다. 문인협회 회원들이 수필을 가르치는 선생님과 선배들을 위해 만든 자리다. 이런 모임은 서로의 사랑과 화합을 갖는 소중한 자리가 되는 것 같다. 선배는 사랑의 눈길로 후배들을 바라보고 후배들은 선배들에게 존경의 눈길을 보낸다. 조촐한 자리지만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가슴이 따스해진다.
김영란법이 통과되면서 요즘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선생님께 작은 선물도 줄 수 없다고 한다. 학생들의 정성으로 쓴 편지와 학생대표가 꽃 한 송이만 가슴에 달아 드릴 수 있다니 어째 마음이 찝찝하다.
우리 어릴 때야 꽃 한 송이도 제대로 꽂아 드릴 수도 없었다. 다들 어려운 시절이다 보니 선물을 드린다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그래도 선생님의 사랑은 깊었고 학생들은 당연한 듯 선생님을 존경한 것 같다.
스승의 노래를 부르니 감회가 새롭다. 학창시절 두 분의 선생님이 생각난다. 육학년 때였다. 중학교 진학시험을 치러야 하는 시기였다. 우리 선생님은 한명이라도 진학시험에 더 합격시키기 위해 여름에는 교실에서 재우고 겨울에도 반 친구 집 넓은 사랑방에 모여 진학지도를 하셨다. 선생님 중에도 교육열이 대단했고 한 사람도 낙오자가 있으면 안 된다면서 대단한 열정으로 우리를 다그쳤다.
학교서 집이 가까운 애들은 집에 가서 밥을 먹고 왔는데 나는 집이 좀 멀었다. 사촌 동생이 학교 올 때 밥을 가지고 왔는데 하루는 아침시간이 지나도 동생이 오지 않아 굶고 있었다. 지금은 한 끼를 걸러도 괜찮은데 그 때는 한 끼만 못 먹어도 기운이 없고 쓰러질 것 같았는지 모르겠다.
그날이 일요일이었는지 지금은 기억에 없다. 다만 밥을 굶고 있는 것을 아신 선생님은 사모님을 시켜 밥과 반찬을 가지고 오게 해서 선생님 책상 앞에 앉아서 밥을 먹게 했다. 보리밥을 더 많이 먹었던 시절이어서 그랬는지 배가 고파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그때 먹었던 하얀 쌀밥은 내 평생에 잊을 수 없는 진수성찬이었다.
결혼 후 경상도에 살다 보니 연락이 되지 않고 친구들에게도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다. 뒤늦게 들은 소식에 의하면 무슨 이유였는지 모르지만 스님이 되었다는 소리를 들었다.
몇 년 전, 친구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스님이 된 담임선생님이 장례식장에 오셨다. 친구 아버님도 교직에 계셨는데 선생님과 형님. 아우하며 지냈다. 장례를 마친 후 스님이 된 선생님이 당신이 계신 사찰에서 제를 올리고 싶다고 했다. 친구네 가족도 그렇게 하자고 했다. 49재가 있는 날에 내가 가면 반가워하셨다. 스님이 된 지 오래됐어도 난 스님이라 부르지 않고 그냥 선생님이라 불렀다. 제자가 아닌 딸처럼 반기고 나 또한 돌아가신 아버지를 만난 듯 응석도 부리고 청소를 안 해서 너무 지저분하다며 잔소리도 했다.
49재를 마치고 바쁘다는 핑계로 찾아뵙지 못했는데 뒤늦게 부고 소식을 접했다. 친구들도 몰랐던지 아무도 연락이 없었다. 자주 찾아가 뵙지 못해도 늘 가슴속에 감사함으로 남아있는 선생님. 오늘같이 스승의 날 행사가 있을 때면 더욱 뵙고 싶다.
중학교 때, 학교에서 집까지 4㎞를 걸어 다녔다. 버스는 하루에 두세 번 정도 다니는데 대부분의 학생들이 걸어 다녔다. 처음으로 미술 선생님이 오셨다. 엄하거나 무서움 대신 늘 부드러운 얼굴로 우리를 대하셨지만, 어딘지 쓸쓸함이 풍겼다. 어느 날, 나는 하교 직전 선생님께 돈 십 원만 달라고 했다. 돈 달라는 학생을 본 적이 없던 선생님은 놀라는 표정으로 왜? 라고 반문했다. 과자가 너무 먹고 싶은데 돈이 없다고 했더니 웃으시면서 선뜻 주머니를 뒤졌다. 선생님을 어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않았던 아주 철없고 당돌한 아이였던 나.
졸업하고 난 후 우연히 만나 뵈었는데 재혼하기 위해 선을 보기 위해 가시던 길이라 했다. 상황상 오래 이야기할 시간이 없어서 헤어진 후 다시 만나는 인연은 없었다. 지금 같으면 전화번호라도 물었을 텐데 그때는 휴대전화는커녕 집전화도 귀하던 시절이었기에 소식이 끊긴 것이다.
스승의 날 행사를 하면서 기억 저편에 있던 한 조각 추억이 떠오르면서 스승님들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소식 없이 지냈지만 가슴속에 남아 지금도 내 인생의 가르침을 주는 스승으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