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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할머니가 되고 싶어요

김지영 대전복지재단 연구개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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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7.08.24 17:41
  • 기자명 By. 충청신문
 
스물두 살 난 딸이랑 수다를 떨던 중, 대화가 저출산 문제까지 이르렀다. “너는 걱정 마. 맞벌이 하게 되면, 아빠랑 엄마가 봐 줄게”하자, 딸아이가 결연하게 대답했다. “엄마, 미안해요. 외손주는 못 보여드릴 것 같아요” 딸아이한테 간간히 결혼과 출산에 대한 회의적인 이야기를 들어오기는 했지만, 이렇게 단호한 출산 거부 선언은 처음 듣는 것이었기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애도 하나 없으면 인생에 뭔 재미가 있겠니’하는 협박성 발언, ‘엄마 평생에 제일 보람 있고 행복했던 일이 너희들 키운 거다’라는 선배 여성으로서 진지한 충고까지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 보았으나, 딸의 결심에는 미동도 없었다. 
 
딸의 친구들도 다 비슷한 생각을 한다는데, 아이 낳겠다는 젊은 여성들이 그렇게 없다면 아들한테서 친손주인들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벌써 심란해졌다.
 
통계청이 23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올해 상반기 출생아 수는 역대 처음으로 20만 명 이하로 떨어졌다. 이 추세대로라면 올해 합계출산율은 약 1.1명대로 떨어질 것이라고 한다. 가히 ‘출산절벽’이라고 부를만한 수치다. 저출산 원인으로는 여러 가지가 일컬어진다. 
 
청년실업 때문에 결혼을 못해서, 주거비나 교육비 등이 너무 비싸서, 일가정 양립이 안 되는 직장문화로 인해 등등. 하지만 정말로 청년취업률을 올리고, 주거비와 교육비를 낮추고, 일가정 양립을 가능하게만 하면 출산율이 올라갈까?
올망졸망한 아이 둘을 키우던 30대 초반은 정말 힘든 시기였다. 잠을 못자고 밥을 제때 못 먹는 육체적 고단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이가 생기면서 지극히 쉬었던 일들이 너무나 힘들어졌다. 
유모차와 함께 가기에는 보도는 너무 좁고 울퉁불퉁하고, 아이를 업고 안고 오르기에는 버스 계단이 너무 높았다. 이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어린아이가 당연히 할 수밖에 없는 행동들, 어른들의 움직임에 거치적거리거나, 칭얼대며 조용한 분위기를 깨뜨리거나 할 때마다 ‘제대로 아이를 관리하지 못하는’ 엄마한테 쏟아지는 주변의 비난 어린 시선이었다.
여성가족정책 전문가인 정재훈 교수의 책 ‘저출산·고령사회와 그 적들’에서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을 발견했다. “어떤 차원의 논쟁에도 불구하고 변할 수 없는 사실은 아직까지는 ‘여성만이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출산은 출산 주체로서 여성의 선택이다” 
 
여성이 출산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육아로 인한 경제적 부담과 경력단절 등에 인한 막대한 기회비용은 물론 그간에 누려온 소소한 즐거움을 포기하는 것까지를 모두 고려해보아도, 아이와 함께 하는 삶이 가치 있고 매력적이라는 판단을 해야 한다.
 
최근 이른바 ‘노키즈존’이 늘어나고 있다. 심지어는 개는 되지만, 아이는 안 된다는 곳까지 있다고 한다. 나는 여기서 어느 순간 우리사회에 자리 잡아버린 아이를 환대하지 않는 문화, 더 심각하게는 ‘아이 혐오’ 또는 ‘엄마 혐오’가 점점 증폭되어 가는 모습을 본다. 
 
아이를 어울려 살아가야 하는 사회의 구성원이 아니라 시끄럽고 지저분한, 성인들의 즐겁고 평화로운 삶을 위해서는 가급적 배제해야 하는 존재로 여기는 사회에서, 아이와 함께 내쳐지는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출산을 결심할 만큼 우직한 젊은 여성은 이제는 별로 없다.
 
마을공동체가 사라지고 이웃이 귀찮거나 아니면 조심해야 하는 존재가 되어버린 상황에서, 내 아이가 마냥 환영 받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모차를 끄는 엄마를 위해 문을 잡아주고, 내 옆 테이블에 앉은 부잡스러운 아이를 너그럽게 보아 넘겨주는, 적어도 아이와 동행했다는 이유로 부모들을 쫓아내지 않는 배려 정도는 기대해도 되지 않을까?
 
나도 할머니가 되고 싶다. 학업과 일에 쫓겨 천천히 음미하지 못했던 아이 키우는 기쁨을 다시 한 번 누리고, 딸아이도 언젠가 ‘애들 키운 것이 제일 큰 보람이었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고 싶다. 문제는 나 혼자 설득하기에는 우리 사회가 아이와 엄마들에게 점점 잔인해진다는 것이다. 이웃들이 시민들이 이런 소망을 이룰 수 있도록 같이 도와주셨으면 좋겠다.
 
김지영 대전복지재단 연구개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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