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목요세평] 가을과 시간의 향기 속에서

서경홍 충남대 인문역량강화(코어)사업단·철학박사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입력 : 2017.09.06 15:24
  • 기자명 By. 충청신문
▲ 서경홍 충남대 인문역량강화(코어)사업단·철학박사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 ‘가을날’은 “주여, 때가 왔습니다”라고 시작한다. 중학교 때 형들이 읽고 있었던 세계의 명시에서 처음 이 시를 접했던 나는 주에게 비장하게 “때가 왔다”라고 외치는 릴케가 다소 의아했다. 더군다나 릴케는 “여름은 아주 위대했고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드리우며 이틀만 남국의 햇빛을 주시어 포도가 달콤하게 익게 해달라”고 애원한다.

위대한 여름이 가고 쓸쓸한 가을이 오는 것에 절망감이 너무도 짙게 배어있었다. 습하고 무더운 여름과 천고마비의 청명한 한국의 가을만을 알고 있었던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한 릴케의 심정을 독일로 유학을 간 첫해에 비로소 알게 되었다.

독일은 맑고 건조한 여름이 지나면 가을은 어느덧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비가 푸슬푸슬 내리는 어둡고 긴 겨울로 접어든다. 그 겨울은 다음해 부활절이 즈음에야 물러서고 다시 봄, 여름이 오는 것이다.

그러니 독일인들에게 얼마 되지 않는 기간 동안의 여름 햇빛은 아주 소중한 것이다. 햇빛이 좋은 여름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선글라스만 끼고 웃통을 벗어젖힌 채 풀밭 위에 누워 일광욕을 하는 것도 주님이 해시계에 위에 드리워놓은 위대한 여름의 그림자이기 때문이다.

그 첫해의 가을과 겨울을 보내며 나는 릴케의 심정을 절실하게 공감하였다. 추분이 지나자 낮의 길이가 짧아지는 것을 두려워 했고 동지가 오면 이제부터 낮이 노루꼬리 만큼씩 길어지겠단 생각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올해도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왔다. 지난 여름도 역시 여느 해 못지않게 더웠고 그 끝에는 비도 많이 내렸다. 그러나 어김없이 찾아온 가을 앞에서 여름은 뜨거운 대지를 안고 다음해를 기약하며 떠나갔다.

벌써 들판엔 가을색이 완연하다. 여름 햇빛을 가득 받은 곡식과 과일들은 야무지게 익어 대지의 기운을 인간에게 돌려주고 자신은 빈 몸으로 남는다. 릴케의 시의 주인공은 “바람이 불어 나뭇잎이 날릴 때, 불안스레 이리저리 가로수 길을 헤맨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삶의 유형을 행동하는 삶, 정치적 삶 그리고 관조적 삶으로 구분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신적 관조는 인간 삶의 최고 가치이자 사명이었고, 그것이 학문과 교육의 기본이 된다.

그에 따르면 관조적 삶은 이성적 사유를 말하며 이 삶이야말로 참된 행복에 이르는 최고인 선이다. 그러나 속도를 중요시하는 산업화 시대를 거치며 생각보다는 활동을 강조하게 되었고, 그것이 정치적 삶으로 포위되었다. 이제는 빠르고 활동적인 것이 삶의 절대가치이며 쓸 데 없는 관조나 명상은 불필요한 것으로 치부되고 말았다.
더군다나 중세의 교회부패, 종교개혁을 지나 프랑스대혁명, 산업혁명, 홀로코스트를 거치며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관조적 삶보다 행동하는 삶을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여기에서 바로 모순이 발생한다. 아렌트는 그 유명한 나치전범 아이히만의 재판과정을 지켜보면서 최고의 악은 평범한 것이며 그것은 순전한 무사유에서 나온 행동이라고 한다.

아이히만이 신념과 명령에 따라 성실히 행동하기 전에 관조적 삶이 있었다면 그 같은 역사적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아이히만처럼 생각 없이 저지르는 범죄는 악의 평범성이 아니라 오히려 악의 전형성이다.

요즘 4차 산업혁명 시대란 말이 대세이다. 정치권, 경제계, 학계 말할 것 없이 이 말이 화두가 되었다. 어리숙한 나로서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수학의 방정식이 떠올랐고 1차, 2차, 3차 방정식으로 올라갈수록 풀이가 어려웠듯이 우리의 삶도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더 어려워지겠구나란 생각을 했다.

우리가 달리는 인생행로에 속도가 빠르면 빨라질수록 우리는 옆으로 스쳐가는 풍경을 놓치거나 볼 수 없는 것은 더 많아진다. 완행열차를 타고 갈 때와 비행기를 타고 갈 때를 비교해보라. 빨라지는 그만큼의 우리는 관조의 시간을 놓치게 되고 삶은 각박해진다. 그것이 바로 피로사회의 전형이다. 그리고 거기에 시간은 향기마저 잃는다.

독일의 첫해 가을, 겨울을 보내고 나 역시 릴케의 시 주인공이 되었다. 여름이 감을 아쉬워하고 단 하루 이틀 만이라도 찬란한 햇빛은 더 받고 싶었다. 그처럼 집이 없었지만 집을 짓지 않았고 가로수길을 헤맸다. 그러나 그 고독은 고독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향기나는 시간 속에서 어딘가로 긴 편지를 썼고 생각하는 집을 지었으며 또 다른 여름을 기다렸다. Vita contemplativa!(사색하는 삶). 이 가을의 초입에 이렇게 외친다.

서경홍 충남대 인문역량강화(코어)사업단·철학박사 

저작권자 © 충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충청신문기사 더보기

하단영역

매체정보

  • 대전광역시 중구 동서대로 1337(용두동, 서현빌딩 7층)
  • 대표전화 : 042) 252-0100
  • 팩스 : 042) 533-7473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황천규
  • 법인명 : 충청신문
  • 제호 : 충청신문
  • 등록번호 : 대전 가 00006
  • 등록일 : 2005-08-23
  • 발행·편집인 : 이경주
  • 사장 : 김충헌
  • 「열린보도원칙」충청신문은 독자와 취재원 등 뉴스이용자의 권리 보장을 위해 반론이나 정정보도, 추후보도를 요청할 수 있는 창구를 열어두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고충처리인 : 노경래 (042-255-2580 / nogol69@dailycc.net)
  • Copyright © 2024 충청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dailycc@dailycc.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