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세상사는 이야기] 동부개떡이 익는 그 집

변정순 음성수필문학회 회장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입력 : 2017.10.10 17:11
  • 기자명 By. 충청신문
 
손톱 밑이 까맣다. 냉장고에 저장해 두었던 동부를 까고 있다. 오늘 까는 동부는 개떡을 만들어 볼 참이다. 잘 될지 모르겠지만 아주 오래전의 맛과 향기가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어서 가능할 것 같다.
 
열 안팎나이 때 우리 동네에는 향우반이 있었다. 일요일이면 새벽부터 큰 아름드리 아카시아 나무가 있는 우리 집 뒤 큰 마당에서 모였다. 동네 중간쯤이었다. 나무에는 쇠종이 달려있었고 마을에 중요한 일이 생길 때면 종을 쳐서 사람들을 모이게 했다. 뉘 집에 불이 날 때는 사정없이 쳐대는 종소리에 놀란 적도 많았지만 마을 길을 청소하러 모이라는 종은 리듬에 맞추어 울렸다. 일찍 모인 향우 봉사반은 두 편으로 나누어 어질러진 길을 쓸었다. 내 키보다 더 크고 무거운 싸리 빗자루를 들고 쓰는 일은 힘겨운 일이었다.
 
이런 날, 엄마는 동부개떡을 찌셨다. 큰일 했다고 공일 날 하루 종일 들락거리며 먹을 우리들의 간식이었다. 가마솥에 겅그레를 얹어 베보자기를 깔고 얇게 편 밀가루 반죽위에 동부를 다문다문 얹어 찐 동부개떡은 한 솥 가득하다. 참기름을 발랐는지 번들번들하니 저절로 군침이 돌게 하고 짭짜름하니 쫄깃한 동부개떡은 어린 시절을 행복하게 했던 먹거리였다. 들에 나가는 엄마는 우리에게 미안한지 늘 먹을 것을 해놓고 나가셨다. 나는 촐랑촐랑 머리꽁지 흔들며 동구 밖으로 뛰었다. 또래 아이들을 불러다 먹일 요량이었다. 오지랖 넓은 딸 때문에 들에서 돌아온 엄마의 목소리가 커질 때도 있었다. 
 
빗장 풀린 대문에 들어서면 동부향이 그득했던 그 집 마당에는 소꿉놀이하는 아이와 닭들이 노닐었고 일 바라지가 많은 집이었다. 아버지는 이른 새벽부터 오밤중까지 들과 집에서 노상 일에 파묻혀 살았다. 한여름 건조실에서는 담배 찌는 냄새가 풍기고 석탄을 이겨 넣어 붉게 타는 불구덩이 위에는 옥수수가 수염채 지글거리며 익기도 하였다. 고동 불을 지피고 나면 아버지는 며칠 밤샘을 하신다. 뜨거워서 위험한 곳, 아무도 접근할 수가 없는 곳, 아버지만의 공간이었다. 그땐 궁금했다. 아버지는 어떻게 졸림을 참고 밤을 새웠을까. 지금 같으면 시계, 스마트폰의 알람이 알려줘서 좀 더 편하게 농사를 지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예전에는 담배농사가 몸에 좋은지 나쁜지는 모르고 목돈이 되니 최고였다. 하여튼 구운 옥수수를 먹을 수 있어서 아버지의 공간 훔쳐보기를 좋아했던 나였다. 
 
늦가을 마당에는 서리내리기 전에 거둬들인 노적가리가 쌓였고 타작하는 날, 신 새벽부터 와랑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스러웠다. 벼가 흩어질까봐 포장을 치고 두 사람이 똑같이 서서 한쪽 발은 땅에 디디고 한쪽 발로 밟으면 와랑 와랑 돌아가며 벼 이삭이 털려나갔고 밟는 속도에 따라 돌아가는 구부린 철사 박힌 둥그런 통에 걸려 볏단은 한단 두단 탈곡되었다. 그 소리는 배부른 소리였다. 동이 터 오를 때 쯤이면 따끈따끈한 동태찌개와 막걸리로 일꾼들의 시린 손을 녹여주었다. 
겨울이 다가오면 겨우 내 땔 나무를 지게에 가득 짐을 지고 험한 산길을 하루에도 여러 번 오르내리는 고단한 삶을 지켰던 할아버지와 아버지, 집안 남자들의 몫이었던 넉넉한 겨울준비는 방마다 따스하게 했다. 겨울밤 사랑방에서는 가마니도 짜고 사각사각 새끼 꼬는 소리도 들렸다. 가끔 그 방이 궁금하여 구경한다고 들어가 보지만 먼지 쐰다고 어른들의 성화에 오래 앉아 있지 못하였다.
 
그랬던 그 집은 지금은 상상 속에 있다. 일하시는 아버지도, 동부깨떡을 찌던 가마솥, 창호지 바른 미닫이문과 닭들이 노닐던 마당, 우물가와 장독대, 담배 건조실, 할아버지 옆에서 노래 부르며 부지깽이로 장단 맞추던 사랑방 쇠죽솥과 큰 눈을 가진 암소의 요령소리도, 내 어린 삶과 추억이 가득 담긴 곳은 현실 속에서 사라졌지만 내 가슴속에는 꽉 차 있다. 어린 시절 이야기가 많은 곳이다. 살아오는 동안 무엇에 대하여도 감사하고 고마움을 알게 해준 그 집은 늘 꿈속의 전경으로 떠오른다. 
그새 동부껍질이 수북하게 쌓였다. 먼저 동부를 가득 넣어 밀가루 반죽을 해야겠다. 그리고 오늘 밤도 꿈꾸러 가야지. 동부개떡이 익는 그리운 집으로.
 
 
 
 
저작권자 © 충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충청신문기사 더보기

하단영역

매체정보

  • 대전광역시 중구 동서대로 1337(용두동, 서현빌딩 7층)
  • 대표전화 : 042) 252-0100
  • 팩스 : 042) 533-7473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황천규
  • 법인명 : 충청신문
  • 제호 : 충청신문
  • 등록번호 : 대전 가 00006
  • 등록일 : 2005-08-23
  • 발행·편집인 : 이경주
  • 사장 : 김충헌
  • 「열린보도원칙」충청신문은 독자와 취재원 등 뉴스이용자의 권리 보장을 위해 반론이나 정정보도, 추후보도를 요청할 수 있는 창구를 열어두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고충처리인 : 노경래 (042-255-2580 / nogol69@dailycc.net)
  • Copyright © 2024 충청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dailycc@dailycc.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