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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속으로] 가을 단상

이혜숙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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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7.11.06 16:59
  • 기자명 By. 충청신문
 
소음도 사라진 시간. 조용해도 너무 조용하다. 시골이라 늘 그러려니 생각하면 오산이다. 시골구석까지 들어선 공장들 땜에 평소엔 시끄럽기 그지없다. 한가위 명절이라 산업현장도 휴가에 들어갔다. 이런 날이 설 명절과 추석명절, 일 년에 두 번은 된다. 오랜만에 한가로운 들길을 걷는다. 오로지 나 혼자 시골 전체를 공유하는 것 같은 이 느낌이 참 좋다.
 
가뭄에 목말라 애태우고 오랜 장맛비에 지친 벼들이 황금물결을 이루며 알알이 꽉 찬 열매를 매달고 고개를 숙이고 있다. 험난한 여정을 마치고 비로소 자신을 발견한 것 같은 겸손한 모습이다. 빈 논도 보인다. 이른 벼를 수확을 했나 보다. 자연의 변화에 순응하며 어려운 시간을 이겨낸 농부들이 환한 미소가 느껴진다.
 
길가의 잡초들도 씨앗을 품고 있다. 풀도 꿋꿋이 이겨낸 것만 열매를 맺는다. 제초제나 낫질에도 꺾이지 않고 꿋꿋하게 버텨낸 것만이 결실을 맺는 것이다. 잡초의 생명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시골에 와서 살면서 더 많이 배운다. 밟히고 찢겨도 다시 일어나는 질긴 생명력에 경이로움까지 느껴진다. 
 
길가밭에 들깨가 베어져 누워서 마르길 기다리고 있다. 들깨밭을 지날 때 들깨 특유의 냄새를 좋아한다. 시골에서만 느낄 수 있는 시골의 향기이기 때문이다. 씨앗을 뿌리고 모종을 심은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수확을 하게 된 것이다. 힘들게 지은 소중한 결실이기에 농부들의 가슴에 행복이 가득하길 기대해본다.
 
봄꽃은 화려하게 들녘을 수놓았다면 가을꽃은 애잔하게 들녘을 수놓고 있다. 보라색의 쑥부쟁이가 바람에 나부낀다. 바람에 몸을 맡기고 하늘거리며 가을과 멋지게 어울리는 가을꽃의 모습은 가슴 시리게 아름답다. 지금은 사라져 많지는 않지만 간간이 보이는 구절초도 파란 가을하늘과 잘 어울린다. 노란 산국은 작은 꽃망울을 조롱조롱 달고 가을의 한가운데로 나를 몰아간다. 이래서 난 가을을 좋아한다. 가녀린 몸으로 나를 향해 손짓하는 가을꽃과 같은 공간에서 사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도 수확을 기쁨을 누렸다. 봄에 심은 땅콩을 거둔 것이다.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정성을 기울이지 못했다. 땅콩을 심은 곳은 풀밭 속에 땅콩이 있는 건지 땅콩밭에 풀이 있는 건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기대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알알이 영근 열매가 뿌리에 매달려 나온다. 많지는 않지만 결실을 가져다주었다.
 
땅콩을 심고 싹이 나지 않아 얼마나 애를 먹었던가. 매일 물을 주며 새싹이 나오길 기다리는데 가느다란 새싹을 내밀었다. 어쩌면 수확은 포기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었지만 가녀린 잎이나마 죽일 수 없어 매일 물을 주었다. 그 결과물이 내 눈앞에 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이곳은 특수작물을 많이 한다. 봄이면 비닐하우스에 수박을 심는다. 당도가 높고 맛이 좋아 서울에서 인기가 최고란다. 수박농사가 끝이 나면 후작으로 방울토마토나 호박을 심는다. 넝쿨을 올리려고 끈을 천정에서 매달아 놓고 곁으로 나오는 순을 계속 쳐서 줄을 맞춰놓았다. 대추모양을 한 토마토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을 보면 꽃 같다. 아름답게 가꾸느라 수고한 농부의 부지런함이 보인다. 
 
요즘은 거의 외국인들이 일손을 보탠다. 기계가 하는 일이 따로 있고 사람 손이 필요한 일이 따로 있다. 부족한 일손은 베트남 사람들이 대신한다. 말은 통하지 않지만 고국에서 농사짓던 분들이라 제법 큰 일손이 된단다. 언제부터 남의 손을 빌려야만 했을까. 앞으로 외국인들이 없으면 농사짓기도 힘들 것 같다.
 
가을이 되자 변화무쌍한 시간을 견뎌낸 작물들이 수확을 기다리고 있다. 얼마 지나지 않으면 여기저기 타작하는 소리가 들릴 것이다. 수확의 기쁨도 중요하지만 농산물 가격도 좋아서 힘들었던 지난날을 보상받았으면 좋겠다.
 
시골의 수입원인 농작물 가격이 일정하지 않아 농부들은 마음을 졸인다. 수요가 많고 공급이 적으면 가격이 올라가지만 수요가 적고 공급이 많으면 가격이 하락해서 인건비도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어렵게 생업에 종사하는 농부들이 마음 놓고 농사지을 날이 오길 기대해본다.
 
이 가을 풍성한 결실이 수확의 손길을 기다리는데 내가 할 수확은 무엇일까. 무엇이 내 인생의 멋지고 알찬 수확이 될까.
 
이혜숙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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