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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낭만을 찾다가

변정순 음성수필문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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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7.11.07 16:33
  • 기자명 By. 충청신문
 
친구의 문자가 떴다.
“이번 주말이 지나면 단풍이 사그러질 것 같다. 오늘 바쁘냐? 세조길이 생각난다”는 메시지였다. 며칠 전 무서리에 은행잎은 우수수 떨어지고 담에 걸쳐진 호박잎과 담쟁이덩굴이 폭삭 주저 않아서 그러잖아도 마음이 뒤숭숭하던 차였다. 그래도 올해는 좀 늦게 서리가 내려서 맨드라미와 용담과 산국 같은 가을꽃을 오래 보았다. 초가을 둘이 갔던 그곳, 단풍이 깊게 들면 한 번 더 가자는 약속을 했던 터였다. 집안일과 다른 일들을 해야 하긴 하지만 모두 제쳐두고 단풍구경을 가야겠다는 마음에 함께 걷자는 문자를 얼른 보내고 길을 나섰다.
 
예전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 할 일을 미루고 나간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다. 마음이 느슨해 진 것인지 쉬고자 함인지 모르겠다.
 
요즘은 단풍든 낙엽 하나하나가 꽃이다. 이 깊은 색감은 염색을 하여도 이리 자연스러울 수는 없을 것이다. 낙엽을 칠하는 가을 아티스트, 오직 가을만이 색칠할 수 있는 낙엽이다. 우리는 아직 생생한 세조길 단풍에 취하여 사람에 취하여 벌써 와 이 길을 걷고 있다. 적당히 차가운 공기와 눈부신 햇살이 산책하기 딱 좋은 날이다. 어린아이들은 부모님 손잡고 촐랑촐랑, 연인들은 팔짱을 끼고 걷는다. 
 
얼마 전 친구는 교통사고로 입원하여 치료도 다하지 않고 퇴원했다. 오래 걷는다는 일이 힘들 텐데 이런 친구가 어떤 마음이 들어선지 카톡을 해왔기에 난 흔쾌히 응하고 단풍구경을 나서기로 한 것이다.
 
가을빛 단풍은 환상 그 자체다. 낭만을 운운하다가 이것도 잠시, 우리는 자동, 삶의 현장으로 이야기 거리를 옮긴다. 오늘의 산책은 자연과만 내통하자고 하면서도 만나면 시부모, 남편에 대해, 자식들 이야기를 입에 올린다.
친구는 자식바보 남편 바보다. 난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오륙십대 주부들은 대부분 가정에서는 1순위에서 밀려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던 터였다. 남편을 잘 조절하여 아내 말을 잘 듣게 하고 자식들에게 희생하여 가정의 편안함을 추구하는 우리세대들이라고. 이쯤 되면 여자다움은 거리가 멀어지고 중성적인 목소리에 톡톡 쏘는 말투로 냉철하게 술술 뱉어내어 가정에서 리더 역할을 하고 있음에도 여기에 맞대응하지 않고 가정의 평화를 위하여 일부러 져주며 사는 남편가장도 많을 거라고. 
 
내 생각이지만 주변사람들의 현실이기도 하다. 그런데 내 친구는 가정에서 순위가 꼴등이다. 남편과 자식에게 최고의 것만 입히고 먹이고, 희생하고 배려하고 살았다 한다. 아침에도 외출하려는 데 아들이 “엄마 또 그 옷 입으세요? 제가 얼른 돈 벌어서 사드릴게요” 말하는 모습이 기특해서 엉덩이를 두드려 주고 나왔다 한다. 유독 이집에서 아들만이 정스럽다고 했다. 그런데도 이런 것들이 이제는 즐겁지가 않다고 했다. 의외였다. 지쳐 보였고 누가 하라고 한 것도 아니고 자신이 모든 일을 자초해 놓고 어쩌란 말인가. 가족이니까 무조건이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은 상처는 가족에게서 제일 많이 받는다는 사실이다. 
 
호르몬 영향도 있지만 스스로에게 배려와 관심이 전혀 없었던 자신을 발견하고는 스트레스가 쌓였던 것이 아닐까 싶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휴일에 남편이 집에 있는 날에는 약속이 있어도 꼼짝 않고 남편 뒷바라지만 했단다. 남과의 약속을 어겨가면서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 가족을 위하고 자신이 행복한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점점 갈수록 자신이 대인관계에도 무관심하게 되고 자신을 더욱 외롭게 만든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한다. 난 친구의 변화에 박수를 쳤고 그와 만남이 갑자기 이루어졌지만 다른 때보다도 훨씬 값진 만남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희노애락 모두 단풍잎에 물들여 함께 간직하고 싶다. 
 
벌써 내려가는 길, 차가운 기온이 싸하다. 클라이맥스로 달려가는 세조길 단풍잎이 떨어지며 얼굴에 와 스친다. 급하게 걷는 사람들 사이에 우리도 끼어서 천천히 걷는다. 오늘 우리는 이곳까지 달려와 자신에게 충분한 휴식을 다 주진 못하였지만 조급해하지 않는 넉넉한 마음을 서로에게 베푼 것 같다. 
 
아차! 사진 찍는 걸 까먹었네. 좀 늦었지만 세조길 에서 최고로 멋진 풍경에서 포즈를 취해본다.
 
잠시 후, 바스락 낭만을 찾아 걸어봐야지.
 
변정순 음성수필문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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