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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세평] 타인의 삶을 통한 실존적 삶의 발견

서경홍 충남대 인문역량강화(코어)사업단·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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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7.11.08 16:40
  • 기자명 By. 충청신문
▲ 서경홍 충남대 인문역량강화(코어)사업단·철학박사

 사르트르에 따르면 인간은 사물과 달리 어떠한 목적 없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이며 이것을 사물의 존재와 구분하여 실존이라 한다. 계몽주의 시대에는 이러한 인간의 본질을 ‘타불라 라사(tabula rasa)’, 즉 아무 글자도 쓰이지 않은 백지상태라 하였다.

그 위에 어떠한 내용을 채우느냐에 따라 인간의 본질이 완성되고 이것은 경험을 통하여 가능하다고 존 로크는 갈파하였다. 본질이 정해지지 않은 채 태어난 인간은 이로 인하여 분리와 소외의 불안에 시달리고 이를 벗어나기 위하여 욕망이란 것이 작동한다.

사르트르는 인간 존재를 즉자적 존재와 대자적 존재로 구분하였다.

대자적 존재는 자신을 의식하면서 그 의식하는 것을 떠날 수 없는 존재이며 즉자적 존재는 스스로를 의식할 수 없고, 자신 속에 갇혀있는 존재이다. 대자적 존재는 자기 자신과 거리감을 유지하지만 즉자적 존재는 거리감이 없다.

대자적 존재의 거리감은 자신을 부정함으로써 성립한다. 인간은 매 순간 이러한 부정을 통해서 자신을 형성해간다. 인간의 존재는 과거에 매달리고 현재에 고착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부정을 통하여 미래로 열려있다.

이러한 과정이 초월이고 초월을 통하여 자유를 찾는다. 에리히 프롬이 말한 “~로부터 도피를 위한 자유”가 아닌 “~을 향한 자유”인 것이다. 이로써 단순한 사물로서의 존재가 아닌 인간주체의 존재, 즉 실존이 성립한다.

영화 '타인의 삶'의 주인공 비즐러는 즉자적 존재로서 살아가는 인물이다. 동독의 비밀경찰기관인 슈타지의 중견간부인 그는 상부로부터 반정부적 성향 때문에 의심받는 극작가 드라이만을 감시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문화계 블랙리스트 한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사찰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드라이만과 그의 애인인 크리스타 일상을 훔쳐보면서 자신의 무목적인 삶을 발견하게 된다.

피아노가 놓여 있고 수많은 책들로 꽉 찬 드라이만의 집을 엿보고 돌아온 그의 집은 무미건조하기만 하다. 무채색의 벽지, 밋밋한 갈색의 패브릭 소파, 짙은 남색의자가 있는 식탁, 차가운 브라운관의 TV. 모든 사물들은 제 자리에 맞게 정돈되어있지만 그 사물자체가 가진 하나의 목적만을 위해 존재한다.

그 집 주인 비즐러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무목적을 채우기 위해 매춘부를 불러 욕망을 채워보려 하지만 그것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는 그저 하나의 가구처럼 슈타지의 일원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비즐러는 그 공간에서 드라이만의 집에서 훔쳐온 시집을 읽는다. 노란색 표지의 레클람 판(版) 브레히트 시집이었다.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책을 펼쳐들고 있는 비즐러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면서 내레이터가 시를 낭송한다.

9월의 푸르스름한 달빛 속 어느 날 나는
어린 자두나무 아래서 조용히 그녀를 안았다
말이 없고 창백한 그녀를 황홀한 꿈처럼
내 품에 안았다.
(…)

머리 위엔 빛나는 여름 하늘에
구름 한 점, 나는 한참을 올려다 보았다
구름은 눈부시게 새하얗고 아득히 높이 떠 있었다
내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구름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

브레히트의 시 ‘마리 A.에 대한 추억’을 읽는 비즐러의 눈가엔 보이지 않는 눈물이 흐른다. 무목적인 즉자적 삶의 인간에서 대자적 실존적 존재로 건너가는 순간이다. 그는 한나 아렌트의 말대로 ‘순전한 무사유’의 세계에서 벗어나 이성과 인식의 세계를 향한 문지방을 넘는다.

영화 속에서도 문지방은 두 가지 존재방식을 나누는 경계선의 상징으로 나온다. 드라이만은 자신이 반체제인사로 체포될 수 있는 결정적 증거인 타자기를 문지방 밑에 숨겨 놓았고, 비즐러는 그 증거물을 인멸한다.

미션실패로 인해 상부로부터 파면을 당한 비즐러는 우체부로 전락한다. 그러는 사이 베를린 장벽은 무너지고 드라이만은 과거의 사건을 책으로 묶어 출판한다.

베를린의 한 책방 앞. 우체부의 캐리어를 끌고 가던 비즐러는 쇼윈도우에 붙은 커다란 포스터를 보게 된다. 비즐러가 쓴 책의 광고포스터였다. 비즐러는 서점 안으로 들어가 판매대에 놓인 드라이만의 책을 한 권 집어든다.

‘선한 이를 위한 소나타’. 계산대로 간 그에게 점원이 “선물하실 건가요?”라고 묻자 비즐러는 처음으로 미소를 지으며 “아뇨, 제가 읽을 겁니다.”라고 말한다.

비즐러를 완벽하게 실존적 인간으로 만들어 준 것은 자신의 노력뿐 아니라 드라이만이 그를 위해 쓴 책이었다. 깊어가는 이 가을에 서점의 판매대에 놓인 책들을 만지작거리다 뿌듯한 표정으로 계산대로 걸어가는 그 누군가를 그려본다.

서경홍 충남대 인문역량강화(코어)사업단·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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