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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속으로] 옆지기

한기연 시인. 평생교육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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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7.11.13 15:56
  • 기자명 By. 충청신문
▲ 한기연 시인. 평생교육강사
가을이다. 문 밖을 나서면 노랗고 붉게 물든 가로수가 보이고, 멀리 시선을 두면 산 전체가 노을빛이다. 요즘 나이가 들어서인지 바쁜 일상 속에서도 고운 단풍이 눈에 들어온다. 혼잣말로 감탄사를 연발하기도 하고 찰나의 시간에 가을을 즐긴다. 
 
아침부터 밤늦도록 일정이 있어서 이동하는 동안만 온전히 혼자인 시간이다. 운전하면서 라디오를 즐겨 듣는데 방송사 사정으로 음악을 연이어 틀어준다. 때 아닌 단풍에 눈이 간 것도 감미로운 음악이 감성을 자극해서 그런 거 같기도 하다. 모든 것 뒤로 하고 떠나고 싶다는 생각과 그럴 수 없는 현실 사이에서 무너진다.
 
남편과 단 둘이 지낸 지 몇 개월이 되었다. 둘째는 대학생활로 객지에 있고, 큰아들도 자신의 꿈을 위해 집을 떠나 서울에서 생활하고 있다. 부부 둘이 남은 집에서 서로 함께하는 시간을 많이 가지면 좋겠지만 그러지 못한다. 
 
주말도 없이 일을 하고 공부하느라 틈이 없는 나와 달리 남편은 퇴근도 일찍하고 시간이 많다. 가을이 되면서 어느 날은 밤을 한 가득 주워오기도 하고, 다람쥐가 도토리를 따서 모으듯이 버섯을 따오기도 했다. 평일에는 가까운 사람들과 술을 마시며 늦게 들어오기도 했다. 그렇게 한 공간에서 각자의 생활을 이어갔다.
 
황금같은 추석연휴를 보내고 나니 일과 공부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대학원 마지막 학기 논문 준비를 하느라 안방에 자료를 펼쳐 놓았다. 집안 살림은 말할 것도 없고, 끼니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하면서 공부에 열중했다. 다행히 남편은 싫은 소리 없이 냉장고에 음식을 꺼내 밥을 챙겨 먹었다. 그러던 중 한 달 전부터 한 쪽 눈가에 떨림 현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일하고 밤늦도록 논문을 쓰느라 무리했더니 몸이 반응을 한 것이다. 욕심껏 공부를 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오랜 시간 컴퓨터 앞에서 작업을 했더니 어깨도 결리고 손가락이 아파서 자판을 두드릴 수도 없었다. 눈 떨림 증세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병원엘 갔더니 스트레스 받지 말고 무조건 쉬라며 처방전도 주지 않는다.
 
눈을 뜰 수조차 없이 아파서 눈을 감고 침대에 누웠다.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는 남편을 불러 아픈 손도 주무르게 했다. 아침마다 저린 손을 주무르게 하고, 아프다는 말을 습관처럼 했다. 내가 아픈 날이 잦아지면서 가끔 술을 마시고 온 남편이 ‘아프지 말라’라는 말을 했다. 내가 아프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는 말을 몇 번이고 되뇌듯 했다.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다. 지금까지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모두 다 해 왔고, 지금도 나 자신만을 위해 욕심을 부린 것이 떠올랐다. 
 
얼마 전에 아는 분의 부탁으로 수필화를 만든 적이 있다. 아는 분의 친구 아내가 오랜 지병 끝에 돌아가시면서 남편에게 편지를 남겼는데 그걸 액자로 만들고 싶다고 하셨단다. 거절할 수 없어서 수필화를 만들 게 되었는데 늦은 밤에 작업을 하게 되었다. 편지를 읽으면서 옮겨적는데 남겨진 자녀와 남편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이 구절구절 가득했다. 투박한 글이지만 오랜 시간 간병을 해 준 남편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도 담겨 있고, 떠난 이로 인해 슬퍼하지 않았으면 하는 따뜻함도 있었다. 
 
스무 해 넘게 부부의 연으로 살다 보니 이젠 무뚝뚝하게 내뱉는 말 한마디에도 애정이 담겨 있음을 알게 됐다. 해를 거듭할수록 사랑의 깊이는 더해가고 정이 쌓여 간다. 아직도 ‘사랑한다’며 함께 시간을 보내자는 남편에게 이젠 더 이상 공부하지 않겠다며,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달래본다.
 
저수지를 굽이돌아 펼쳐지는 고운 빛깔의 단풍에 눈이 내리고 또 다시 봄이 오는 풍경을 이젠 옆지기와 함께 오롯이 나누고 즐기고 싶다.
 
한기연 시인. 평생교육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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