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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속으로] 겨울양식

이혜숙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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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7.12.04 17:01
  • 기자명 By. 충청신문
 
고갱이를 파란 잎으로 감싸 안고 토실토실 잘도 자랐다. 지난해보다 늦게 심어 제대로 배추 모양이나 나올까 걱정했는데 텃밭 가득 싱싱한 잎이 나풀거린다. 나름 성공했다고 생각하고 동생에게 전화했다. 김장하러 오라고.
 
400여 포기나 되는 배추를 한꺼번에 절이자니 소금 소비도 많고 너무 복잡할 것 같아서 내 것부터 하기로 했다. 혼자 사는 친구도 주고 제주에 가 있는 아들도 주려면 백여 포기 정도는 해야 한다. 친구는 힘든데 뭘 그리 많이 하느냐고 하지만 그 정도야 마음만 내면 뭐가 어려울까. 힘들어 못 한다고 하지만 하기 싫은 것일 뿐 못할 것은 없다는 생각이다.
 
조용하던 집이 시끌벅적하다. 혼자 조용히 지내다가 방안 가득 북적대니 정신이 없다. 올케 언니와 동생 부부 조카 부부에 아이들까지 오니 집안이 꽉 찼다. 도시에 살 때는 내 것만 하면 되었는데 시골로 오고부터 내가 직접 재배한 배추로 형제들과 함께 하고 있다. 나만 하려고 했는데 마음이 편하지 않다. 천사 콤플렉스도 아니고 내 신세를 내가 볶고 있다. 부모님 안 계셔서 형제들 모일 기회도 없는데 이렇게라도 해야 떨어져 사는 가족들이 우애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사람 냄새가 나는 것이 아닐까.
 
아침 일찍 일어나 배추 씻느라 허리가 부러질 것 같다. 인공 디스크를 넣는 수술을 한 시원찮은 허리는 구부리는 것이 매우 힘들다. 그래도 손이 많으니 빠르게 할 수 있다. 올케 언니는 다음부터 힘드니 고모 것만 하라고 하고 동생댁은 시골서 하니까 좋다고 한다. 아파트의 좁은 공간에서 하다가 시골서 하니까 물 버리기도 좋고 쓰레기 버리기 쉬워서 좋은 모양이다. 내년엔 내 것만 심어 나 혼자 할 테니 다들 알아서 하라고 했지만 아마도 나는 또 배추를 많이 심을 것이다.
 
여동생은 사업이 바빠 오지 못한다. 나는 담근 김장을 박스에 담았다. 동생은 시간 되면 가져갈 테니 그냥 두라고 한다. 느긋한 동생은 세월없이 있다가 올 것이다. 냉장고에 바로 넣지 않으면 발효되어 김치 넣은 비닐봉투가 터진다. 성질 급한 나는 김장김치를 차에 실어 가져다줄 것이다.
 
‘김장은 한겨울에도 채소를 먹기 위해 소금으로 배추를 절여 먹게 된 것이 발전하여 오늘날의 김치가 된 것이다. 초기에는 단순하게 채소를 소금에 절인 형태였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을 통해 고추의 들어오면서 빨간 김치를 담그게 되었다. 각종 양념과 재료를 넣어 만드는 김치 담그는 법이 유네스코에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김치가 한국의 대표 음식으로 세계에 알려진 것이다.
 
옛날 어른들은 김장하는 일이 겨울양식이라고 했다. 비닐하우스 농사를 짓는 시절도 아니고 냉장고가 있던 시절도 아니어서 그랬을 것이다. 김장김치는 장독에 담아 땅속에 묻어서 싱싱함을 유지했다. 
 
김치는 담가서 바로 먹으면 싱싱하며 아삭한 맛이 일품이다. 그러나 며칠 지나서 익기 전까지는 맛이 없다. 아삭하지도 익지도 않아 떨떠름한 게 젓가락이 가지 않는다. 그러다 발효되어 익으면 김치로서의 진가를 발휘한다. 반찬으로 그냥 먹어도 좋고 돼지고기를 넣어 김치찌개를 하면 구수한 맛이 입맛을 돋운다. 비 오는 날에 김치전에 막걸리를 마시면 제대로 풍류를 즐기는 날이 된다. 
 
인생도 김치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젊을 때는 보기만 해도 싱그러움이 느껴지고 희망 차 보인다. 그러다 중년이 되면 싱싱하지도 곰삭지도 않은 어정쩡한 상태가 된다. 어리다고 하기엔 아는 게 많은 것 같고 알 것 같지만 뭔가 부족하고 설지도 익지도 않은 어중간하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그러다 나이가 들면 많은 경험으로 삶의 지혜가 쌓이고 완숙한 인간미를 풍기며 여유로운 참 인격이 나타나게 된다. 예로부터 젊은 사람들이 어른들에게 삶의 지혜를 배우게 되는 이유일 것이다. 혼합된 많은 재료가 섞여 숙성되어야 맛있는 김치가 되듯이 인간의 삶도 희로애락을 겪고 곰삭아야 완벽한 인격이 완성되지 않을까? 
푸른 꽃처럼 보이던 배추밭이 훤하다. 서너 달 정도 자란 배추는 사람에게 다 내어주면서 멋진 비움의 철학을 내게 가르쳐 주었다. 나도 저렇게 멋지게 비울 수 있는 삶을 이어갔으면 좋겠다.
 
이혜숙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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