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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 장 담그기

변정순 음성수필문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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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8.03.13 16:31
  • 기자명 By. 충청신문
▲ 변정순 음성수필문학회 회장

장을 담으려고 달력에 닭과 말이 그려져 있는 날이 언제인가 살펴보았다. 장은 말날이나 닭날에 담그는 것이 좋다고 들어서 평일이지만 닭날로 정했다. 장은 정월에 담가야 맛있다고 하여 입춘 지나 바로 담자고 마음속에 준비를 한 것이 여태 미뤄오다 경칩인 날 시도를 했다. 내가 다니는 사찰에서 메주를 사오긴 했지만 가끔 집안에 메주 뜨는 냄새를 진동시킨 메주를 씻어 항아리에 담고 소금물을 찰랑찰랑 붓고 마른 고추와 숯을 얹었다.

그리고 맑은 햇살과 바람이 찾아와 장맛다운 장이 되길 소원하고 나니 김장 다음으로 한 해의 음식 농사를 다 지은 듯이 뿌듯했다. 뚜껑을 덮고 연실 항아리를 닦았다. 장 담그기는 네 번째다. 오랫동안 친정에서 얻어 다 먹다가 어머님 몸이 불편하신 뒤로는 직접 담가 먹는다. 지난해에는 정월장 담그는 것을 놓치고 삼월장을 담갔다. 삼월장은 정월장보다 소금을 조금 더 많이 풀어야 장맛이 변치 않는다고 했는데 작년에는 소금을 덜 넣었는지 장맛이 조금 시큼했다. 계속 초보다. 친정엄마 장 담그는 모습을 가끔 눈대중으로만 봐 온 터인데 장을 담그고자 하는 나는 도대체 어디서 나온 자신감인지 생각할수록 웃음이 나온다.

농사짓던 친정집은 가을수확이 끝나면 김장을 하고 메주를 쑤었다. 좋은 메주콩을 골라 밤새 물에 불리면 서 너 배 정도의 크기로 불거진다. 불거진 콩을 가마솥에 넣고 끓여 콩이 무르익으면 황금빛을 지나 불그스레한 빛이 돈다. 허물거리며 구수하게 잘 익은 콩을 건져 물기를 빼고 절구통에 찧어 내어 보자기를 깐 직사각형 나무틀에 물이 잘 빠진 메주를 넣고 자근자근 밟아서 메주를 만든다. 메주의 겉면이 며칠 꾸덕꾸덕 마르면 이것을 짚으로 엮어 사랑방 시렁 위에 매단다. 겨우내 사랑방에 마실 꾼도 드나들며 따뜻한 온기와 바람을 통해 매달려 있는 메주는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곰팡이를 피운다. 이렇게 잘 숙성된 메주를 가지고 장을 담가 천하일품 단맛이 나는 친정집 장맛을 만든 것이다.

어머니의 장 담그기는 며칠 전부터 시작된다. 메주를 깨끗이 씻어 말리고 항아리 속은 짚에 불을 붙여 소독하여 놓는다. 친정집 장독대는 뒤 곁 건물 계단을 올라가야 볼 수 있다. 그 무거운 고추장 된장 항아리를 땅보다 높은 곳에 올려놓고 올라 내렸는지. 장 한번 담그려면 얼마나 많을 발품을 팔았을까. 칼국수를 하는 날은 “얘야 장독대에 올라가서 장물을 좀 떠 가지고 와라” 하시면 난 조심히 장독대에 올라가 항아리 뚜껑을 열고 간장을 떠냈다. 까맣고 말간 간장을 일단 손가락으로 찍어 먹어 본다. 어머니는 “위험하니 조심히 올라 다니라” 고 늘 말씀을 하시면서도 장독대를 옮기지는 않았다. 무엇이든 퍼다 먹기 편하게 장독대를 샘 옆으로 옮기자고 하여도 끄떡도 하지 않으셨다.

그곳은 신성한 곳, 자식들 잘되라고 두 손 모으는 곳, 하늘과 더 가까이 하여 부정 타지 않게 살뜰히 보살피던 곳, 신주단지 모시듯이한 곳이었다.

시부모님 모시며 시동생 시누이 모두 출가시키며 고단한 그 설움을 그곳에 올라가 반질반질 닦으며 아마도 장독에 풀어냈으리라. 그리 귀한 것이 없던 시절 이 항아리만큼 귀한 것이 어디 있었을꼬. 그 깊은 장맛 같은 엄마의 마음을 이제야 알 것 같다. 몇 해 전부터 장을 직접 담그지는 못하시지만 그곳의 장독에는 짭짜름한 깊은 장맛이 들어있을 것이다. 엄마의 고달픔과 정성이 아직 그곳에 있을 테니까.

따스한 햇볕이 장항아리에 내리쬔다. 금방이라도 장맛을 익힐 것 같은 기세다. 봄이 이르게 오고 있는 건가. 닭날, 날도 잘 받아 장을 담갔으니 가끔 바람 좋은 날 장독 뚜껑 열어주는 일과 잘 익기를 기다리는 일만 남은 것 같다. 이제는 느긋하게.

변정순 음성수필문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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