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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포럼] 3·1 독립만세운동과 한글

이노신 호서대학교 인문융합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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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8.03.22 16:44
  • 기자명 By. 충청신문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게 된 가장 큰 밑거름 가운데 하나는 당시 한글사용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10년대에 이르러 한글의 문법과 맞춤법의 체계화가 진행되었으며 우리말을 집대성하는 사전편찬이 진행되었다. 기미독립선언문 작성에는 한글과 한자(漢字)가 혼용되었으며, 특히 전체적인 문장구조는 우리말 어순을 따랐다. 이에 더 많은 백성들이 보다 쉽게 선언문의 내용에 담긴 민족자결주의와 강력한 독립의지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었다.

이것은 커다란 파격이었다. 직전까지도 주요 공식문서는 한글을 배제한 채 중국어 어순으로 작성되는 한문이 사용되었다. 따라서 중국어 어순에 의해 한자로만 작성된 한문을 일반 백성들은 어렵게 여겼고 오직 양반들만이 내용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작성된 기미독립선언문은 2월 27일 2만1000장이 인쇄되었다. 3월 1일까지 천도교와 기독교, 불교, 학생단의 전국 조직망을 통하여 서울과 전국으로 배포되었다. 전국 각지에서는 독립선언문이 배포된 즉시 대중들 앞에서 낭독되었다. 이를 기점으로 3·1 만세운동은 들불처럼 한반도 전역으로 순식간에 번져 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한글의 처음 이름은 ‘훈민정음’이다.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의미이다. 1443년에 창제되어 1446년 국가적으로 정식 반포되었다. 그러나 이후 전혀 대접 받지 못하였다. 한자의 보조문자로서 또는 아녀자나 천민계급이었던 승려들이 사용하는 하급문자로 전락하였다. 사서삼경과 같은 유교경전이나 유명 중국 시인의 작품 원본 제작 시 훈민정음 사용이 허용되지 않았다. 오직 원문에 대한 해설서 편찬만이 허용되었다. 일례로 두보의 시를 해설한 편찬서가 ‘두시언해(杜詩諺解)’이다. 여기서 언해란 언문(諺文)으로 풀어 쓴 해설을 말한다. 언문이란 ‘예의 없는 상소리를 적는 글’이다. 세종대왕께서 창제하신 훈민정음을 수백 년 동안 이처럼 상소리를 적는 ‘언문’이라고 불렀다. 상소리는 바로 우리 한국어를 가리킨다. 중국어를 받들어 존숭한 결과로 우리말을 스스로 격하시킨 것이다.

한글이 체계화되는 결정적 계기가 발생하였다. 1882년 만주 봉천에서 존 로스라는 스코틀랜드장로회 목사가 최초의 순 한글성경인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를 출판하였다. 당시 스코틀랜드의 고유어인 켈트어는 잉글랜드의 지속적인 언어말살정책에 의해 거의 소멸된 상태였다. 일제에 의해 자행되었던 한국어 말살정책은 잉글랜드에 의한 스코틀랜드어 말살정책을 모방한 것이다. 자신의 고유어를 잃어버린 채 영어를 사용해야만 했던 스코틀랜드인 로스 목사는 따라서 조선인들이 민족정신과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한글이 폭넓게 사용되어야 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에 커다란 열정을 가지고 평북 정주출신 조선인 조사들의 도움으로 기독교의 성경 원본을 순 한글로 출간하였다. 창제된 지 439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해설서 작성용이 아닌 경전의 원본을 기록하게 되었다. 한글다운 모습과 품격을 갖춰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구한말 외세의 침략 속에 민족정체성이 자각되었고 이와 함께 한글 존중의식에 불을 붙였다. 1894년 갑오개혁 때는 고종황제가 칙령으로 ‘국문’으로 선포하였다. 수백 년 동안 상소리를 적는 ‘언문,’ 여성들이 사용하는 ‘암글,’ 중국어 발음을 위한 보조 기호인 ‘반절,’ 승려들이 사용하는 ‘중글’ 등과 같이 격하되어 불려오던 한글이 국가와 민족 정체성의 정수를 담는 문자로 공식화된 것이었다. 1910년 이후 일제는 국문이라는 단어사용을 금지시켰다. 그러자 주시경 선생께서 한글이라는 단어를 대신 널리 보급하셨고 이후 오늘날까지 우리글이 한글로 불려오고 있다.

이처럼 한글은 창제 이후 우리 민족의 역사적 굴곡 및 애환과 궤도를 함께 해 왔다. 한글을 스스로 격하했었던 시대에는 우리 민족의 자존감도 낮았고 열등의식 속에서 다양한 자기학대 증세를 보였다. 반대로 한글이 제대로 존중받고 품격이 올라갔을 때 비로소 민족정체성 또한 드높아지고 똘똘 뭉쳐서 외세에 조직적으로 저항하며 독립을 부르짖었다. 그러므로 3·1 독립만세운동은 한글이 우리 민족의 얼과 정체성을 담을 수 있을 만큼 체계화되고 존중받았을 때 일어난 민족해방운동이다.

이노신 호서대학교 인문융합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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