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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의사 상해의거 78주년을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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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0.04.28 19:25
  • 기자명 By. 충청신문/ 기자
1. 들어가는 말

2010년 4월 29일은 매헌(梅軒) 윤봉길(尹奉吉, 1908-1932) 의사의 상해의거 78주년이 되는 아주 뜻 깊은 날이다.

윤봉길 의사는 충남 예산이 배출한 불세출의 애국지사이다. 그는 25세를 일기로 순국해 불꽃같은 짧은 인생을 살았지만 월진회를 조직해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하고 상해의거를 일으켜 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그리하여 그의 고향인 충의사에서는 그의 숭고한 애국애족정신과 위대한 업적을 창조적으로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해마다 4월 29일이 돌아오면 ‘매헌문화제’를 개최하고 있다.

그리고 윤봉길 의사 기념사업회에서는 윤봉길 의사의 생애를 그린 전기영화를 만들고 서울특별시 서초구 양재동과 상해 홍커우공원(虹口公園)에 기념관을 건립하는가 하면 ‘윤봉길 의사 평전’을 발간하고 윤봉길 의사 노래를 제정하며 학술대회를 개최하는 등 다채로운 행사를 개최해 윤봉길 의사의 애국애족정신과 업적을 길이 선양하고 있다.

그런데 국정교과서인 중·고등학교의 국사 교과서에는 상해의거만 간단하게 소개돼 있어 대부분의 국민들은 그의 진면목을 잘 알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실정이다.

그리하여 필자는 충남의 향토 문화와 역사를 체계적으로 조사연구하고 있는 향토 교육자의 한 사람으로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윤봉길 의사 상해의거 78주년을 맞이해 먼저 윤봉길 의사의 생애와 업적를 간략히 종합적으로 살펴보고 상해의거의 역사적 의의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2. 윤봉길 의사의 생애와 업적

매헌 윤봉길 의사는 1908년 6월 21일(음력 5월 23일) 오후 8시 경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178번지의 도중도 광현당에서 원효봉의 정기를 타고 파평윤씨(坡平尹氏) 문중에서 아버지 윤황과 어머니 김원상 사이의 5남 2녀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아버지 윤황(尹璜) 공은 성실한 농부였고 어머니 경주김씨(慶州金氏) 원상(元祥) 여사는 친정에서 ‘소학’을 배운 평범한 여인이었다.

윤봉길 의사는 고려 때 여진 정벌에 큰 공을 세운 윤관(尹瓘)장군의 27대손이다. 본명은 우의(禹儀)였고, 이밖에 희의도 썼으며, 자는 용기(鏞起)였다. ‘봉길’(奉吉)은 별명으로 불리웠으며, 아호는 ‘매헌(梅軒)’이라 했다.

4세 때에 광현당에서 저한당으로 옮겨와 23세까지 생활했다. 7세 때에 ‘천자문(千字文)’을 외우고 ‘동몽선습(童蒙先習)’을 학습했다. 11세 때에 덕산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12세 때에 3·1 독립운동에 자극받아 식민지 교육을 배격하다가 덕산공립보통학교를 자퇴하고 잠시 시량리 솔밭 뒤에 있는 최병대(崔秉大) 문하에서 한학을 수학했다. 14세 때에 서당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유학자인 매곡(梅谷) 성주록(成周錄) 선생의 문하생이 돼 사서오경(四書五經)을 배웠다. 15세 때에 성주 배(裵)씨인 용순(用順) 여사와 결혼해 슬하에 아들 종(淙)을 두었다. 16세 때에는 오치서숙 춘추 시회에서 장원을 했다. 18세 때에는 일본어를 혼자 익히고 부지런히 신학문을 접했다. 돈이 생기면 예산 읍내에 나가 신문·잡지·단행본 등 여러 종류의 읽을거리를 사와 읽었으며, 특히 ‘개벽’잡지를 열심히 구독했다. 예산에서 구할 수 없는 책은 사람을 시켜 서울 등 대도시에서 구해오도록 해 읽었다. 19세 때에는 오치서숙의 한학수업을 마쳤다. 오치서숙을 떠나게 될 때 매곡 선생이 ‘매헌(梅軒)’이라는 아호를 석별의 정으로 지어주었다. 한편 그는 농촌 계몽과 부흥운동 및 독서회운동을 시작했고, 한시 300여 편을 써서 책으로 엮어, ‘명추(嗚推)·옥타(玉睡)·임추(壬椎)’ 등의 제목을 붙여 작품집을 만들었다. 20세 때에는 ‘농민독본’3권을 저술해 농촌 계몽과 부흥운동의 교재로 활용했다. 21세 때에는 부흥원(復興院)을 설립한 다음, 기념 우화인 ‘토끼와 여우’를 공연하고 월례강연회를 개최하는가 하면 ‘기사년(己巳年) 일기(日記)’를 쓰고, 위친계(爲親契)와 월진회(月進會)와 수암체육회(修巖體育會)를 조직했다. 그런데 일제는 윤봉길 의사의 농촌 계몽과 부흥운동을 항일독립운동이라 해 광주학생운동 직후에 월진회를 해체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가혹한 탄압을 가했다. 그러자 윤봉길 의사는 향리에서 더 이상 농촌 계몽과 부흥운동을 지속하기 불가능함을 깨닫고 23세 때인 1930년 3월 6일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이란 유서를 남기고 더욱 더 적극적인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충의대교를 지나 삽교역에서 기차를 타고 중국으로 망명하다가 선천에서 미행하던 일본 경찰에 붙잡혀 45일 간이나 옥고를 치러야 했다. 출옥 후 김태식(金泰植)과 한일진(韓一眞) 등의 동지들과 함께 당당하게 독립운동을 준비하기 위해 1930년 10월에 만주 독립군기지를 돌아보고, 그 해 연말에 중국 대련(大連)을 거쳐 청도(靑島)에 도착했다. 윤봉길 의사는 그곳에서 다음 해 여름까지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모색하던 중 세탁소를 전전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그는 세탁소 일로 모은 돈을 고향의 어머님께 문안편지와 함께 보냈다. 그 후 24세 때인 1931년 5월 8일에는 중국 청도에서 배편으로 상해로 건너가 프랑스 조계인 하비로화합방(霞飛路和合坊) 동포석로(東蒲石路) 19호인 안공근(安恭根)의 집 3층에 숙소를 정하고 동포실업가 박진(朴震)이 경영하는 공장의 직공으로 일하면서 상해영어학교에서 수업을 받았다. 그리고 열악한 분위기를 개선하고자 노동조합인 한인공우회를 조직하고 노동야학과 노동환경개선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다가 상해 임시정부의 백범(白凡) 김구(金九) 선생을 찾아가 김구(金九), 이유필(李裕弼), 최동오(崔東旿), 김현구(金鉉九), 김의한(金毅漢), 김두봉(金枓奉), 박창세(朴昌世), 안공근(安恭根) 등과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중 한인애국단의 이봉창(李奉昌, 1900-1932)이 1932년 1월 8일 동경에서 일본 왕을 폭살하려다가 실패, 상해 일대가 매우 혼란했다.

일제는 의도적인 일본승려사건을 계기로 1932년 1월 28일 상해사변을 도발해 시라카와(白川義則) 대장을 사령관으로 삼아 중국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탓에 경비가 삼엄했다.

그런데 윤봉길 의사는 이동녕(李東寧), 이시영(李始榮), 조소앙(趙素昻) 등과 상해 거류민단 사무실에서 항일독립운동을 하다가 25세 때인 1932년 4월 26일에 ‘한인애국단 선서식’을 거행하고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돼 백범(白凡) 김구(金九) 선생과 기념촬영을 했다. 그리고 1932년 4월 29일 11시40분(한국시간 12시40분)에는 상해 홍커우공원 의거를 일으켜 세계만방에 한민족의 독립 의지와 기개를 떨쳤다. 실제로 그는 일본의 천장절(天長節)과 전승기념 축하식 단상에 수통형 폭탄을 투척해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대장과 상하이 거류민 단장 가와바다(河端貞次)를 즉사시키고, 일본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野村吉三郞)·제9사단장 우에다(植田謙吉)·주중 일본 공사 시케미쓰(重光葵) 등에게 중상을 입혀 중국 침략의 군관민 수괴들을 응징했다.

그리하여 그는 1932년 5월 28일 상해파견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1932년 11월 18일 일제 대양환으로 일본 오사카로 호송돼 11월 20일 오사카 육군 형무소에 수감됐다. 그 후 그는 1932년 12월 18일 가나자와 육군구금소로 이감돼 1932년 12월 19일 아침 7시40분에 25세를 일기로 가나자와 교외 미고우시 육군 공병작업장에서 총살형으로 순국했다.

<계속..>

신상구/천안중학교 국사과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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