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가 분열되는 상황에서도 안정적으로 살림살이를 책임지며 혁신과 개조를 꾀한 독립지사다. 경남 양산 출신으로, 1909년 중국에서 근대학문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일본 유학을 떠났다.
메이지대학 법학과에 입학해 조선유학생학우회 임원으로 활동했고, 반제국주의 비밀결사조직인 신아동맹당에 가입해 집회와 연설 등으로 반일운동을 펼쳤다.
고국에 돌아온 1916년부터는 대동청년단, 백산무역주식회사, 의춘상행, 기미육영회 등과 관계를 맺으며 비밀결사운동과 경제적 자립운동에 앞장섰다.
윤현진은 1919년 3·1운동 뒤 상하이로 망명해 임시정부 내무위원으로 선정됐다. 국내 항일 세력과의 연락을 위한 의용단을 조직했고, 독립신문을 발간하기 위한 독립신문사 발기인 등을 맡았다.
정부는 독립운동을 주도하다가 스물아홉 살에 순국한 그에게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독립기념관은 4월 한 달간 야외 특별기획전시장에서 윤현진의 공훈을 기리는 전시회를 열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