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 정치가 돼지를 잡지 않으면
[아침을 열며] 정치가 돼지를 잡지 않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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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4.08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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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순택 논설실장
▲ 안순택 논설실장

‘약속을 했으면 지켜라’하고 가르칠 때 보기로 드는 옛 이야기가 있습니다. ‘증자가 돼지를 잡았다’라는 이야기지요.


증자의 아내가 장을 보러 나서는데 어린 아들이 따라가겠다고 떼를 씁니다. 아내는 “얌전히 기다리면 다녀와서 돼지를 잡아 요리해주마”하고 달랬습니다. 장에 다녀오니 증자가 소중한 돼지를 묶어 놓고 칼을 갈고 있었지요. 깜짝 놀란 아내는 “아이를 달래려 한 말인데, 진짜로 잡으면 어떡해요”하고 말리며 따졌습니다.


그러자 증자는 “아이는 부모를 보고 배우는데, 당신이 아이에게 한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아이가 무얼 배우겠소. 어머니가 아이를 속이고 아이가 어머니를 믿지 않게 된다면 무엇으로 교육을 시키겠소” 하고는 돼지를 잡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증자(曾子. 기원전 506~436)의 본명은 증삼(曾參)으로, 공자와 안자, 자사, 맹자와 함께 동양 5성(聖)의 한 분입니다. 그의 가르침은 공자의 손자 자사(子思)를 거쳐 맹자에게 전해졌지요. 사서삼경 중의 하나인 ‘대학(大學)’의 저자로도 알려져 있는데, 대학의 가르침이 왜 그렇게 꼬장꼬장한지 알 것 같습니다.


증자가 돼지를 잡았다면 아예 집 한 채를 물려준 통 큰 이야기가 우리나라에 전합니다. 조선시대 중기에 살았던 왕족이자 문신인 이경검은 자식에게 한 말을 지키기 위해 25칸 집 한 채를 딸에게 물려줍니다.


‘장자상속’이 엄격했던 유교 사회에서 아들을 제쳐놓고 딸에게 집을 물려준다는 건 대단한 파격이 아닐 수 없지요. 사연은 이렇습니다. 이경검은 ‘딸 바보의 원조’였던 것 같습니다. 임진왜란 와중에 망가진 집을 수리하는 것을 감독하러 가면서 금지옥엽 딸을 업고 다녔습니다. 그때 무심코 “다 고치면 이 집을 주마”하고 농담처럼 말했는데, 그 말을 들은 딸은 자신이 이 집의 주인이라고 자랑하고 다녔답니다. 단순한 말실수라고 얼버무릴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아버지로서 선비로서 자기 말에 책임지는 길을 택했던 겁니다.


그는 상속문서를 작성했는데, 훗날 자식들 사이에 재산 다툼이 생길까 봐 문서에 ‘다른 자식들은 불평하지 말라’는 조항과 맏아들의 서명까지 챙겨두었습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이 번역한 ‘이경검 부부 별급문기’(1596년)에 담긴 내용입니다.


옳으나 그르냐 논란을 부르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미생지신(尾生之信)’이란 이야기입니다.


미생은 춘추시대 노나라 사람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약속을 어기지 않았다고 하지요. 사랑하는 여인과 다리 아래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그는 나가서 기다렸지만 여인은 오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장대비가 쏟아지더니 개울물이 불어나기 시작했지요. 하지만 그는 떠나지 않고 마냥 여인을 기다리다 다리 기둥을 끌어안은 채 익사하고 말았답니다.


‘약속 지키기와 믿음의 화신’ 미생을 장자는 ‘융통성 없고 어리석은 놈’이라고 통박합니다. 물론 미생뿐이 아니지요. 지조의 상징인 백이(伯夷)와 숙제(叔齊), 자신의 넓적다리 살을 베어 문공(文公)에게 먹였으나 문공에게 배신당하자 면산에 은둔하다 불타오르는 나무를 부여안고 죽은 개자추(介子推)도 장자에게 요즘 말로 씹혔습니다. 쓸데없는 명분에 빠져 소중한 생명을 가벼이 여겼다는 거지요.


가깝게는 박근혜 전 대통령과 정몽준 전 한나라당 대표가 미생의 이야기를 놓고 논쟁을 벌였습니다. 이명박 정부가 세종시법 수정안을 발표했을 때인데, 박근혜 한나라당 의원은 같은 당임에도 공약은 지켜져야 한다며 수정안에 반대했지요. 당시 정몽준 한나라당 대표가 이 미생의 이야기를 들어 박 의원의 융통성 없음을 꼬집자, 박 의원은 “미생은 죽었어도 귀감이 됐고 그 여인은 평생 괴로움 속에서 손가락질을 받았다”고 되받았지요.


약속 이야기를 꺼낸 건 지방선거에 개헌 투표를 하겠다던 각 당 대선후보들의 공약이 가물가물해져 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약속은 했으면 지켜야 합니까, 융통성을 따져 어겨도 된다고 보십니까?
나는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 한다는 쪽입니다. 특히 정치인의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치인이 공약을 어기면서 나라의 미래를 짊어질 다음 세대에게 무엇을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어기려면 설득이라도 해서 국민에게 이해를 구해야 하는 게 도리 아닐까요.


‘증자의 돼지’ 이야기에는 뒷이야기가 있습니다. 깊은 밤, 증자가 잠자리에 들려는데 아들이 밖으로 나가더랍니다. 증자가 어디 가느냐 하고 물었더니 “친구에게 책을 빌렸는데 오늘 돌려주기로 했습니다. 다녀오겠습니다”하고 나가더라는 겁니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걸 식언(食言)이라고 합니다. 한번 입 밖에 낸 말을 도로 입 속에 넣는다는 뜻이지요. 비록 말이라도 먹다 보면 체할 수 있는 겁니다. 꼭꼭 씹어서 먹지 않으면 탈 나기 십상이지요.


안순택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