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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포럼]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4·19 혁명

이노신 (호서대학교 인문융합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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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8.04.18 22:57
  • 기자명 By. 장선화 기자
우리 가곡 중에 ‘사월의 노래’는 그 제목 만큼이나 4월에 널리 사랑받는 곡이다.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편지를) 읽노라’로 시작하는데, 청록파 시인 박목월의 시에 작곡가 김순애가 곡을 붙여 한국전쟁이 끝나가던 1953년에 만들었다. 여기서 ‘베르테르의 편지’는 사실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지칭한다. 특이하게 소설의 내용 대부분이 시작부터 종결까지 편지들을 통해 전달되고 있기 때문이다. 독자들이 이 소설을 읽고 있노라면 마치 주인공 베르테르가 그의 친구 빌헬름에게 쓴 수많은 편지들을 읽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괴테는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1774년에 출간했다. 작가의 나이 25세였다. 나오자마자 유럽 전역에서 독일문학사상 초유의 대박을 쳤다. 유럽의 수많은 젊은이들은 소설 속 주인공인 베르테르를 따라하기 바빴다. 그들 사이에서 노란 셔츠(블라우스)에 파란 연미복 외투를 걸치는 것이 대유행하였다. 소설의 주인공 베르테르의 의상 패션을 그대로 따라한 것이었다.

심지어 베르테르의 비극적 죽음조차 모방하였다. 국적을 초월하여 엄청난 숫자의 유럽 젊은이들이 실제 있지도 않은 인물 베르테르처럼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소설 출간 후 몇 년 사이에 유럽에서 1500명이 넘은 청년들이 베르테르처럼 권총자살 했다는 설이 있을 정도이다. 그 심각성이 너무 큰 나머지 로마 교황청을 비롯하여 이탈리아나 덴마크의 주요 지역에서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금서로 지정하여 유통을 금지시킬 정도였다. 그렇다면 소설 속에서 청년 주인공 베르테르를 절망시켜 자살로 몰고 간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왜 수많은 유럽의 청년들은 집단적으로 신들린 것처럼 허구의 베르테르를 따라 자살했을까?

그것은 당시 유럽의 가장 큰 문제였던 계급차별로 인한 갈등 때문이었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유럽 전역을 휩쓸며 15년이 지났을 무렵, 1789년 프랑스에서 대혁명이 발발하였다. 혁명의 근본원인은 계급갈등이었다. 젊은 청년들이 베르테르를 따라서 연쇄 자살했던 원인과 동일하였다. 성난 프랑스 국민들은 봉기하여 1000년이 넘도록 자신들을 억압했던 왕과 왕족, 귀족, 사제들을 단두대에서 처형하였다. 파리 시내에 살고 있었던 약 1만9000명의 귀족들이 국민들에게 잡혀 단두대에서 목이 잘렸다. 프랑스는 그렇게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국민 스스로의 힘으로 왕정을 폐지하고 국민이 주인이 되는 공화국의 역사를 만들어 나갔다.

그로부터 약 200년이 지난 1960년 4월 19일 대한민국에 4·19 혁명이 일어났다. 독일인들은 보리수나무 아래서, 프랑스인들은 너도밤나무 아래에서 읽었을지도 몰랐던 ‘베르테르의 편지’를 한국인들은 4월의 목련꽃 그늘 아래서 읽었다. 영구집권을 위한 3·15 부정선거에 항거하기 위해서 대한민국의 젊은 청년들이 거리로 나와 투쟁하였다. 시민과 지식인들도 가세하였다. 4월 26일 결국 국민들의 강력한 저항에 굴복하여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를 발표하면서 정권이 막을 내렸다. 부패한 독점적 정치권력의 상징이었던 자유당도 해체되었다.

장기간의 침탈과 전쟁은 초강력 충격을 가하며 그동안 사회를 단단하게 지탱해왔던 기존 질서를 근본에서부터 뒤틀고 붕괴시킨다. 사실 1960년도의 대한민국은 36년 동안의 일제강점기와 3년 동안의 한국동란을 거친 직후였다. 그 과정에서 조선왕조 519년 동안에 권력질서를 유지했던 계급제도와 유교주의는 원상복구가 불가능할 정도로 붕괴된 상태에 놓였다. 경복궁, 창덕궁과 같은 궁궐은 계속 남아 있었으나 입궐하여 다시금 나라의 주인노릇을 할 왕은 더 이상 없었다. 이미 국가의 주권은 왕에서 국민으로 넘어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4·19 혁명이 일어났던 1960년도는 국토강산이 일제에 수탈당하고 6·25 동란으로 파괴되어 매우 힘들고 가난했던 시기였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국민이 주인이 되는 새로운 대한민국이 일어나던 희망찬 시기였다. 그 속에서 4·19 혁명은 대한민국의 미래 역사를 이미 스러져버린 왕조시대의 구질서로 되돌리기 위해 시도되었던 대통령종신제 개헌 및 3·15 부정선거를 심판하고 단죄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1960년도의 대한민국 국민들은 유럽에서 이미 대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베르테르의 편지를 읽으며 새로운 역사창조를 위한 강력한 메시지를 발견해 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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