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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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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0.05.11 21:02
  • 기자명 By. 뉴스관리자 기자
1894년 배재학당에 입학한 이승만(李承晩)은 일본 공사가 명성황후를 시해하자 이를 보복하기 위한 사건에 관계돼 지명수배를 당했으나 미국인 여의사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그 후 서재필이 주도한 독립협회 간부로 활동하고 만민공동회를 개최했으며 협성회보(協成會報)의 주필로 활동했고 1904년 고조 광무제의 밀서를 가지고 미국으로 가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일본의 대한제국 침략 저지를 호소했으나 성과를 얻지 못했다.

조지워싱턴대학교·하버드대학교에서 수학하고 1910년 프린스턴대학교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은 영세중립론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10년 일제의 불법 침략에 의한 경술늑약에 의해 대한제국이 일제에 병탄이 되자 귀국해 대한기독교청년회연합회(YMCA)를 중심으로 후진 양성에 힘썼다.

1912년 ‘105인 사건’에 연루돼 체포됐으나 미국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석방돼 같은 해 미국에서 열린 세계감리교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하기 위해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1914년 박용만의 초청으로 하와이에 건너가 잡지 한국태평양을 창간해 대한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미국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는 독립외교론을 주장했다.

이런 외교론은 박용만 등이 주장하는 무장투쟁론과 대립됐다. 1919년 4월 13일 중국 상해(上海)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을 때 초대 국무총리로 선임됐다.

이후 워싱턴에 구미위원부를 설치하고 1920년 상해로 돌아가 대통령에 취임했으나 1922년 6월 임시정부로부터 불신임을 받았다. 1933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맹회의에 참석해 대한국의 독립을 호소했으며 워싱턴과 하와이에서 외교론을 전개했다.

이승만은 1945년 8·15 대한 광복 이후 10월에 귀국해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조직, 총재에 취임했으며 미국의 지지를 얻어 우익세력의 연합조직체인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의장, 민족통일총본부 총재를 역임했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된 5개년 신탁통치에 반대해 찬탁을 주장하는 조선공산당을 중심으로 하는 좌익세력을 제압하는데 커다란 기여를 했다.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1946년 6월 전라북도 정읍에서 남한단독정부 수립계획을 발표했으며, 단독정부수립 계획에 대한 미국의 지지를 호소했다.

1948년 5·10 총선거로 구성된 제헌국회에서 국회의장에 선출됐으며 7월 대통령중심제로 헌법이 제정·공포돼 국회에서 초대 대통령에 선출됐고 철저한 친미·반공주의자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기초를 다졌다.

김민수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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