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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푸근했던 스승의 날을 보내며

박종용 대전화정초등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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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8.06.03 16:06
  • 기자명 By. 충청신문
▲ 박종용 대전화정초등학교 교장

2018년 5월 15일은 제37회 스승의 날이다. 스승의 날을 없애느니 마느니 의견이 분분하다. 시대의 흐름에 역행한다는 것은 퇴보를 의미한다. 갑론을박을 지켜보며, 억지로 바꾸려 용쓰기 보다는,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바로잡아 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마음이 싱숭생숭 들떠 있다가, 36년 전 경기도 초임지에서 가르쳤던 용희가 보낸 꽃바구니를 받았다. 베트남에서 여행하며 보냈다고 한다.

안성에 사는 국형이도 건어물을 보내왔다. 어느새 48살이라며 선생님과 같이 늙어간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34년 전에 충남 서천에서 가르쳤던 석호는, 교육청의 스승 찾기를 통해 내 근무처를 알아냈다고 했다. 초등학교 교사로 있는 아내와 창원에서 산다고 했다. 석호와 얽힌 그 시절 에피소드 몇 가지를 떠올리니 별걸 다 기억하신다며 좋아했다.

대전법동초등학교 학부모님 세 분이 점심을 함께하자며 찾아오셨다. 대전법동초등학교는, 2013년 3월부터 2016년 2월까지, 3년간 교장으로 근무했던 곳이다. 대전법동초 학부모님들을 생각하면 그저 고맙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다. 대전법동초를 떠난 지 2년이 넘었건만 지금도 수시로 찾아오시거나 연락하신다. 초임 교장이기에 미숙한 점이 많았을 텐데 모두 묻어주셨다.

반면에, 대수롭지 않았던 실적도 엄청난 성과였던 것처럼 큰 칭찬을 보태어 지금의 대전화정초 학부모님들께 옮기셨다. 대전법동초와 대전화정초가 대덕구 관내에 있다 보니, 학부모님들끼리 직장에서 만나거나 알고 지내는 경우가 많아, 나에 대한 정보가 속속들이 전해졌다. 그것에 대한 부담도 느꼈지만, 더욱더 분발하는 계기도 되었다.

오후에는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받는 사람의 주소란이 ‘대전법동초등학교’로 되어 있는데, 누군가 편지를 반송하지 않고, 고맙게도 ‘대전화정초등학교’로 고쳐서 내게 보내주었다. 편지지 한 장 빼곡하게 손으로 정성껏 쓴 글이 눈에 들어왔다. 편지를 보낸 주인공은 80세가 넘으신 어르신이셨다. 뜻밖이었다.

‘존경하는 교장 선생님, 안녕하셨습니까? 저는, 선생님께서 희망과 용기를 주셔서, 우리 한글을 배우고, 영어 단어에 푹 빠져 있던 박정균입니다. 따스한 봄날에 설레는 마음으로 법동초등학교를 다녔는데 어느덧 4년이라는 세월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교장 선생님을 통하여 우리 한글을 배우게 되어 얼마나 행복했었는지 모릅니다. ~ 중략 ~ 법동초등학교에서 교실문을 활짝 열어놓고 배움에 목마른 사람들이 함께 모여 공부하는 것이 얼마나 행복했던지 경험한 사람만이 알 수 있습니다. 가족 모두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2018년 5월 14일 박정균 올림’

그러니까 2013년 10월의 어느 날이었다. 당시 대전시교육청에서 평생교육을 담당했던 지미영 사무관님(現, 지방서기관)께서 교장실로 찾아오셨다. 초등학교 과정의 학교교육 기회를 상실한 성인들에게 학습기회를 제공하려는데 배움의 장소를 마련하기가 쉽지 않다고 하셨다. 특히, 동부 지역의 어르신들을 위해 대전법동초등학교에서 검토해 보면 어떻겠느냐고 의향을 물으셨다.

학교장 혼자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부장교사들의 의견을 구했다. 어르신들이기에 안전사고가 우려되지만, 우리가 맡아 보기로 의기투합했다. 그렇게 해서 우리 학교에 대전평생교육대학(성인문해교실) 초등과정이 개설됐다. 2014년 3월 5일에 열린 늦깎이 신입생들의 입학식에는, 60세부터 82세까지, 24명의 어르신들이 참석했다. 김신호 교육감님도 격려해 주셨다.

나는, 어르신들을 부모님이라 여겨, 불편하지 않도록 정성을 다했다. 제천의 문해교육기관인 솔뫼학교도 함께 다녀오고, 시 창작 방법을 직접 가르치기도 했다. 냉·난방을 수시로 점검하며 쾌적한 환경을 조성했다. 그 해 12월 24일,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24명 모두, 초등학교 학력인정서를 설동호 교육감님으로부터 받았다.

짧다면 짧은 10개월 동안, 여러 가지 사정으로 교육기회를 잃은 어르신들이, 어린애처럼 활기차고 행복하게 학교 생활하는 모습을 보며 무척 흐뭇했다. 담임을 맡아 열정적으로 지도했던 정은숙 강사님과 낯선 업무에도 불구하고 성심성의껏 어르신들을 도왔던 정유미 선생님의 공로도 컸다.

오후 7시 30분쯤, 자전거를 타고 퇴근하려다가 “선생님! 사랑합니다. 따뜻한 가르침, 감사합니다”라고 쓰인 현수막 2개를 발견했다. 누가 게시했는지 알 수 없지만 페달을 밟는 발에 힘이 붙었다. 마음은 푸근하고, 바람은 참 시원했다.

박종용 대전화정초등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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