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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존댓말은 나비효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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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8.10.28 16:26
  • 기자명 By. 충청신문
박종용대전화정초등학교 교장
박종용대전화정초등학교 교장

출근길이었다. 현관문을 막 열려던 참이었는데, “오늘 우리 학급도 축구를 하나요?”라는 소리가 들렸다. 뒤 돌아보니 4학년 몇 명이 있었다. 존댓말로 질문했기에 내게 질문하는 줄 알았는데, “맞아요. 오늘 우리 반과 3반의 경기가 있어요.”라고 다른 학생이 대답했다.

우리 학교는 엘리트 축구부를 운영하고 있다. 2016년 3월에 화정초 교장으로 부임했을 때 축구 선수는 6학년 4명뿐이었다. 축구감독님도 새로 부임한지 2개월 밖에 안 되었다. 난감했다. 축구부 해체 이야기가 오갔다. 축구부는 우리 학교 교기로서 나름대로 전통이 있는데, 선수가 부족하다고 함부로 없앨 수는 없었다.

일반 학생들로 엔트리를 구성하여 대전시소년체육대회를 비롯하여 주말리그에 참여했다. 한 골 넣기도 쉽지 않았다. 두 자릿수 점수 차이로 패배할 때도 있었다. 우리 학교를 배려하여 후보 선수를 기용(?)해 주는 상대팀도 있었다. 선수들에게 패배해도 좋으니 당당하게만 경기해 달라고 부탁했다.

김영식 감독님과 2~3년 뒤를 내다보며 선수 수급 계획도 세웠다. 축구붐 조성을 위해 4~6학년이 참여하는 학급 대항 축구대회도 개최했다. 엘리트 농구부가 있던 대전법동초등학교에서 3년간 교장으로 근무하며, ‘학급별 농구대회’와 ‘학교장을 이겨라! 자유투(Free throw) 대회’를 실시했던 경험을 차용했다.

아침에 만난 학생도 친구들과 학급 대항 축구대회와 관련하여 주고받은 이야기였다. 학생이 경어(敬語)를 사용했기에, 당연히 나에게 질문했을 것이라 착각했다. 이렇게 우리 학교 3~4학년 학생들은 서로를 높여 부르는 존중어를 사용하고 있다. 2년 전에 박화성 선생님이 학급에서 처음 시도한 게 계기가 되었다.

처음에는 경어로 대화하는 학생들의 모습이 참으로 어색했다. 아이들답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친구들끼리 다투면서도 높임말을 하며, 감정을 억누르는 모습을 목격하고, 속으로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상대방을 존중하는 말로 다투니 큰 싸움으로 번지진 않았다. 금세 화해가 되었다.

2017학년도에는 존중어를 사용하는 학급이 더 늘었다. 박 선생님과 동학년을 맡은 홍미란 인성부장님과 김은경 선생님께서 벤치마킹하여 학급에 적용하셨다. 자연스럽게 3학년 전체가 친구와 대화할 때 존중어를 사용하게 됐다. 나는 욕심이 생겼다. 2018학년도에 학교의 역점사업으로 채택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가 며칠 만에 뜻을 접었다. 학교의 역점사업으로 채택하면, 지시와 통제, 실적과 평가로 인해, 박 선생님의 순수한 동기가 훼손되거나 얼룩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박 선생님께서 지속적인 펌프질을 할 수 있도록, 다른 학생들도 존중어를 맛볼 수 있도록, 3학년 담임을 연속으로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한편, 올해 4학년으로 승급한 학생들의 존중어 사용은, 선생님들이 바뀌었기에,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근데 그게 아니었다. 4학년 담임을 맡고 있는 허혜영 국어부장님을 비롯하여 박현정⋅김영임 선생님은, 자발적으로 학생들의 존중어 사용이 습관화될 수 있도록 꾸준히 지도해 주셨다. 

올해도 한글날 앞뒤로 우리말을 아끼고 사랑하자는 칼럼이나 기사가 참 많았다. 은어와 비속어 사용으로 한글이 파괴된다며 안타깝다는 글도 있었다. 중고생들의 급식체와 직장인들의 급여체로 인해 세대 간 소통이 단절된다는 지적도 많았다. 나는 이런 현상에 대해 비관적으로만 바라보지 않는다.

1990년대에 ‘삐삐’란 무선호출기가 많이 사용될 때에는, ‘8255(빨리 와)’ ‘1010235(열렬히 사모합니다)’와 같은 숫자로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휴대전화가 필수품이 된 지금은, 실시간으로 대화를 위해 새로운 형태의 통신언어가 등장했다. 새로운 표준어나 사어(死語)로 자리 잡기 위한 생성과 소멸의 과정이라고 본다. 

정작 큰 문제는, 아름다운 우리말을 부끄럽게 사용하는 데에 있다. 자기 눈의 들보는 생각하지 않고, 거짓말로 남을 선동하거나, 침소봉대하여 남을 비방하는 사람과 함께 있어야 할 때, 참으로 거북하다. 괜히 불쾌해지기도 한다. 아침 이슬을 소가 먹으면 우유가 되지만, 뱀이 먹으면 독이 된다는 이치와 같다. 

그런 면에서 어린 학생들의 올바른 언어 습관을 위해 노력하는 우리 선생님들이 자랑스럽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이 있다지만, 언어 이상의 것이 또 있을까? 아래 학년에서 가르치신 학생 간의 존중어 사용이 더욱더 빛나도록 맥을 이어 지도해 주시는 4학년 선생님들께도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박종용 대전화정초등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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