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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포럼] 월동을 준비하는 11월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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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8.11.01 16:28
  • 기자명 By. 충청신문
이노신호서대 인문융합대학 교수
이노신호서대 인문융합대학 교수

11월이면 가을도 끝자락에 접어든다. 논밭에서는 10월의 수확기에 열외 되었던 끝물들이 서리를 가득 맞은 채로 질긴 생명을 이어가는 시기다. 여기에서 의외로 절로 탄성이 나오는 반전의 별미가 탄생하기도 한다. 

독일이나 캐나다에서는 원래 수확을 놓친 포도송이들이 나무에 붙어 차갑고 건조한 11월의 겨울 날씨에 쪼그라들면 그것을 따서 와인을 만드는데, 그것이 세계적인 아이스와인의 시초가 되었다. 그 맛의 달콤함과 부드러움은 그 어떤 다른 와인도 제대로 따라갈 수 없는 아이스와인만의 독특함이다. 우리나라는 겨울바람을 맞고 자란 봄동이나 겨울 부추, 겨울 시금치 등이 아주 맛이 좋다. 만물을 시들게 만드는 온갖 서리와 풍설 속에서도 살아남은 노지 겨울 채소의 맛은 일품 중의 일품이다.

11월은 김장철이다. 다음 해 봄이 올 때까지 먹을 수 있도록 소금에 절인 가을배추에 고춧가루와 채소를 버무린 양념을 넣어 김장김치를 담근다. 동치미와 백김치를 함께 담그기도 한다. 또한 옛날 시골에서는 건넛방 윗목 한 구석에 수수깡으로 엮은 작은 울타리를 친 뒤 그 안에 고구마를 얼지 않게 보관하며 겨우내 꺼내 쪄먹기도 하였다. 가을무는 수확 후 이파리와 줄기 부분을 제거한 후 땅 속에 보관하여 겨울에 꺼내 먹었다. 배추도 마찬가지이다. 

11월의 월동준비는 우리나라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서양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서양에서는 11월을 블러드 먼스(Blood month, 피의 달)이라고 불렀다. 육식을 주로 하는 서양에서는 채소 대신 소나 양, 돼지와 같은 동물들을 도축하여 월동준비를 하였기 때문이다. 이맘때가 되면 가가호호 가축들을 잡아서 소금과 향신료를 가미한 뒤 각 부위별로 훈제하여 말리기도 하고, 소시지나 햄으로 만들어 겨울동안 먹을 수 있도록 준비를 하였다. 

이렇게 준비된 고기들은 새해 2월 초순경에 오는 기독교 행사인 사순절 직전까지 소비한다. 특히 사순절 직전에는 대대적인 축제를 벌이고 육류 음식을 마음껏 섭취함으로써 전년 11월에 만들었던 육류제품들을 사실상 거의 전부 먹어 치운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념하는 40일 동안의 사순절 기간에는 육류섭취가 금지되기 때문에 직전에 고기를 배부르게 먹으며 큰 축제를 벌이는데 그것이 바로 카니발로 유명한 마디 그라(Madi Gras) 축제이다.

마디 그라 축제에서는 전년도에 월동용으로 비축한 고기를 소진시킴과 동시에 잉여 가축들을 도축함으로써 새 봄을 준비한다. 사실 만물의 소생을 의미하는 사순절(Lent)은 종교적인 행사이자 동시에 봄날의 가축 번식기와 겹쳐 있다. 따라서 40일에 달하는 그 기간 동안 육류섭취를 금지시켜 무분별한 도축을 방지하며 새끼 가축들이 탄생하고 자라게 하는 효과도 있다. 

한국에서는 이맘때 집집마다 갈떡(가래떡 또는 가을떡의 준말)을 하여 나눠 먹기도 하고, 엿기름을 띄워 감주(식혜)를 만들어 먹기도 하였다. 가을이란 원래 추수를 의미하는 ‘갈다’ ‘갈아엎는다’에서 유래되었다. 따라서 갈떡이란 늦은 가을날 추수를 마친 후에 맞추는 떡이라는 뜻이다. 갈떡으로는 주로 가래떡이나 시루떡을 하는데 이것 또한 저장하여 한동안 꺼내 먹을 수 있는 겨울음식이었다. 

서양에서는 사과 과수원에서 상품성이 약한 열매들을 모아 잼을 만들기도 하고 기계로 사과과즙을 내어 플라스틱 용기에 담아 판매한다. 매년 이맘때가 되면 서양의 마트에서는 사이다라는 이름이 붙은 살짝 발효되어 탄산이 약하게 함유된 착즙 사과과즙을 구매할 수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판매하는 과당 탄산음료인 사이다와는 전혀 다르다. 또한 포도 과수원에서는 그 해에 수확한 포도로 만든 와인을 판매한다. 한 때 우리나라에서도 유행했었던 ‘보졸레 누보’가 그것이다. 햇 포도주라서 깊이 숙성된 맛은 없지만, 그해 생산된 신선함과 함께 값이 매우 저렴하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식사에 곁들이기 위해 부담 없이 찾는다. 

이처럼 11월은 우리나라와 서양 모두 본격적으로 겨울채비를 하는 달이다. 겨우내 먹을 식량을 마련하고 비축하는 시간이다. 하지만 이러한 것도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를 켜면 온라인 마트에서 전부 해결이 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할머니가 이웃들과 김장을 하시고, 갈떡을 하시고, 감주를 만드시는 장면들은 향기로운 추억이 되었다. 

편의점이나 TV 홈쇼핑, 컴퓨터 온라인 마트를 일상적으로 경험하며 사는 현 젊은 세대들은 그들만의 이런 것들을 추억으로 삼고 살아가는 때가 올 것이다. 모든 것들은 언젠가는 사라지고 따라서 추억은 늘 세대마다 다르다. 마치 11월의 시간 속에서 사라져 가는 지난 여름의 많은 것들처럼.

이노신 호서대 인문융합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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