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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속으로] 겨울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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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8.11.26 15:40
  • 기자명 By. 충청신문
이혜숙수필가
이혜숙수필가

잠이 가득 찬 눈을 비비고 새벽같이 일어났다. 모자에 두툼한 스웨터, 헤드랜턴까지 끼고 완전 무장을 하고 밖으로 나갔다. 늦가을 새벽 추위는 온 몸을 움츠리게 한다. 늦잠꾸러기가 아침 일찍 일어나기란 보통 어려운 게 아니지만 어쩔 수 없다. 어제 절여놓은 배추를 씻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은 일이 많아도 너무 많은 토요일이다. 중국어 공부하는 날이고 주민자치위원회에서 주최하는 알뜰장터에 가서 공연도 해야 한다. 일을 마치고 씻으면 배추가 너무 절여져서 짜게 될까 봐 부지런을 떤 것이다. 배추를 씻으며 멸치, 다시마, 파뿌리, 황태대가리를 넣어 육수도 끓였다. 배추를 씻으며 가마솥에 불을 때느라 왔다 갔다 일어서기를 얼마나 했는지 허리는 끊어질 것 같고 어깨는 빠질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은 김치를 사먹는다고 한다. 이렇게 힘드니 김장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다. 솜씨는 없지만 사먹는 김치는 맛이 없어서 힘들고 귀찮아도 김장을 담근다. 세 시간 동안 정신없이 움직였더니 백여 포기되는 배추를 씻을 수가 있었다.

씻으면서 배추를 먹어보니 고소하기가 예전보다 훨씬 더하다. 해마다 심었어도 이렇게 고소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농약을 줄 수 없어 막걸리와 목초액. 식초를 섞어서 주었는데도 벌레는 없어지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벌레부터 잡았다. 기온이 내려가자 숨어 있던 벌레가 햇살이 따뜻한 한낮에 나타나 낮에 잡아야 했다. 

허리가 아프도록 벌레를 잡다가 지쳐서 벌레가 먹고 남는 것을 먹자고 잡기를 포기하다가도 벌레가 배추 꼭대기에 있는 걸 보면 또 잡게 된다. 잡은 벌레가 수백 마리는 될 것 같다. 애를 써가며 키워서일까. 한 포기 한 포기가 소중하다.

힘든 일을 할 때마다 엄마가 생각난다. 지금이야 물과 도구도 좋고 김장 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이 편리하지만, 엄마는 펌프 물로 배추를 씻고 불을 때서 육수를 우려냈다. 고무장갑도 없이 맨손으로 배추를 버무렸다. 겨우내 먹을 양식준비로 며칠을 고생했을 것이다. 그때는 왜 그렇게 추웠는지 난방도 불을 때서 했기에 더 추웠을 것이다. 김장을 마치고 나면 온몸이 꽁꽁 얼 것 같다. 

배추 백 포기는 기본이고 동치미에 깍두기, 총각김치까지 양도 얼마나 많은지 아침부터 시작해도 밤늦게까지 했던 것 같다. 방안에 들어와서 맨손으로 김치를 버무려서 화끈거리는 손을 찬물에 담그고 화기를 빼는데 그런 모습이 엄마니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얼마나 철없는 딸이었는지. 맛나고 좋은 음식을 대접하고 함께 여행을 하고 싶은데 엄마는 40여 년 전 57세의 나이로 이승과의 짧은 인연을 마감했다.

토요일에 배추를 절이고 일요일에 버무리려고 했는데 일요일에 사촌동생 딸의 결혼이 있다. 어쩔 수 없이 금요일 배추를 절이고 토요일 새벽부터 부지런을 떨었다. 공연이 12시에 끝났다. 곧바로 집으로 와서 양념 준비를 했다.

사업에 바쁜 여동생, 외국여인과 결혼한 막냇동생은 해마다 여기서 김장을 해간다. 막내는 언제 김장하느냐며 수시로 전화를 한다. 두 내외가 직장에 다니기 때문에 시간을 맞추려고 하는 것이다. 날짜가 정해져 있지 않으니 김치통만 갖다놓으라 했다. 

엄마를 생각하면서 감사한 마음으로 김장을 했다. 두 동생과 아이들, 회사일로 바쁜 지인들. 좋은 사람들에게 나눠줄 것을 생각하니 힘들어도 기쁘게 하게 된다. 백여 포기나 되는 배추인데도 일하는 조건이 좋아서 훨씬 쉬웠다.

중국어 강사와 회사 쉬는 날인 지인도 와서 함께 버무렸더니 빨리 끝낼 수 있었다. 힘들었지만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먹음직스러운 김장김치가 방긋 웃는 것 같다.

김장을 하려면 배추만으로는 할 수 없다. 무, 갓, 파, 육수, 젓갈 등 갖은 양념과 함께 버무려야 비로소 김치가 되는 것이다. 나는 어떤 김치였을까. 세상에서 어떤 사람들과 버무려졌을까. 갖은 양념이 섞여 어우러져 맛이 나는 친구들이 얼마나 될까. 좋은 사람도 많고 불편한 사람도 있다. 그렇다고 좋은 사람하고만 버무려지지 못한다. 역겨운 냄새에도 양념과 버무려지면 맛을 내는 젓갈과 같이 불편한 사람까지도 어울리면서 조금씩 성장했을 것이다. 돌아보면 모든 사람들과 함께 하면서 진정한 맛을 낼 줄 아는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친구들 덕분에 힘든 일도 쉽고 빠르게 끝낼 수 있음에 감사하다. 오늘 나를 도와준 친구들은 맛있는 양념 같은 사람이다. 세상에 좋은 사람들하고만 지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좋기만 하면 자신을 돌아보고 발전할 수 없을 것이다. 온갖 양념이 어울려져야 맛있는 김치가 되듯이 많은 사람과 맛나게 어울리고 싶다. 한국인의 밥상에 없어서는 안 될 겨울양식인 김장처럼.

이혜숙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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