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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건축과 선비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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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8.12.09 17:53
  • 기자명 By. 충청신문
정관영 공학박사・우석대학교 겸임교수
정관영 공학박사・우석대학교 겸임교수

새벽안개를 가르며 두어 시간을 달려 안동 길주초등학교에 도착하였다.

교육인적자원부에서 시행하는 학교시설 안전강화사업의 일환으로 안전인증심사를 위해서다. 교장실에 들어서니 한 벽면을 장식한 도산서당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렇지 않아도 학교심사를 마치는 대로 도산서당을 들려갈 참이었다. 

도산서원 넓은 마당에는 햇볕이 내려와 세월과 함께한 왕 버드나무를 비추니 나무와 그림자가 더없이 고풍스럽다. 마당 한쪽에서 등 굽은 고목을 보며 전주 경기전 뜰의 고매(古梅)와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옛 건축물 가운데 빼어난 건축미와 운치를 자랑하는 건축물을 든다면 ‘도산서당’을 빼놓을 수 없다. 퇴계 이황이 생전 학문 탐구의 처소로 삼고자 지은 건축물이기도 하지만, 크지도 않고 요란한 장식도 없으면서 한 사람이 지내기엔 부족함이 없는 품격을 자랑하는 건축물이기 때문이다.   도산서당은 온돌방 하나, 마루 하나, 그리고 부엌이 달린 집이다. 더 클 필요도 없지만, 더 작아서는 곤란한 최적의 크기다. 그 모습은 단정한 선비의 풍모 그대로다. 도산서당의 품격이 바로 여기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도산서당에서 퇴계 이황은 타계하기까지 10년간 머물렀다. 온돌방과 마루, 부엌으로 이루어진 소박한 세 칸짜리 집에서 조선 성리학의 수준을 끌어올리고 기라성 같은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모름지기 ‘건축의 품격은 기둥의 치장이나 지붕의 아름다운 곡선으로 얻어지는 게 아니라 주인의 인품에서 나온다’는 것을 새삼 실감케 한다.

퇴계의 삶과 학문, 조선시대 정신사 속에서 도산서당의 건축이 갖는 의미는 매우 크다. 이황이 도산서당을 지은 것은 그의 나이 61세(1561)가 되었을 때였다. 도산서당을 짓기 전에도 다섯 차례에 걸쳐 자신의 거처를 마련하느라 정성을 다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퇴계가 그토록 절박하게 좋은 터를 구해 집을 짓고자 한 것은 과연 무슨 이유였을까. 

소박하고 엄격하게 절제된 도산서당의 모습에서 퇴계로 대표되는 16세기 선비들의 정신을 읽을 수 있다. 장수(藏修)와 유식(遊息)에 크고 화려한 공간이 필요치 않다는 태도는 이 시절 선비들의 공통된 자세로 중국 주자학, 그리고 17세기 이후 한국 성리학의 흐름과도 구별되지 않을까. 

도산서당의 완락재(玩樂齋)는 책을 읽고 잠을 자는 장수의 공간이다. 바닥은 온돌로 난방을 하고, 벽에는 책이나 문방용품을 놓을 선반을 꾸몄다. 특히 온돌은 장수의 공간을 만드는 한 방법이었다. 벽이 사방을 둘러싸고 낮은 천장을 한 따듯한 온돌 바닥은 책을 읽고 공부하기에 알맞았다.  암서헌(巖栖軒)은 두 면이 개방된 도산서당의 마루방이다. 공부로 피로한 심신을 달래는 유식의 공간이며, 손님을 접대하거나 의식을 치르는 공간이었다. 마루는 유식의 공간을 만드는 전통 건축기법으로 돋보인다. 

벽이 개방되고 바닥이 시원한 마루는 주변을 바라보며 휴식을 취하고 찾아오는 손님을 맞기에 적합했다. 쉬면서 몸과 마음에 휴식을 주는 유식은 장수와 함께 선비들에게 꼭 필요한 과정이었으리라. 

도산서당이 크지 않으며 소박하고 단정할 수 있었던 것은 온돌방과 마루에는 따로 의자나 침상이 필요하지 않았다. 책을 보는 데는 낮은 책상이면 족했고, 잠은 방바닥에 이부자리를 펴는 것으로 충분했다. 손님이 찾아오면 마루에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바깥 경치를 함께 즐기면 되었다.

도산서당을 지으면서 단지 건물만 세운 게 아니라 집 곁에 못(淨友塘)을 만들어 연꽃을 심었다. 샘(蒙泉)을 파고, 매화, 대나무, 소나무, 국화 등 꽃나무를 심어 화단(節友社)을 조성하였다. 마당을 둘러싸는 울타리를 만들고 사립문(幽貞門)을 냈다. 경내의 조경요소를 통해서도 선비정신을 스스로 고양시키고자 한 흔적이 묻어난다. 이처럼 퇴계의 시대에 집과 원림(苑林)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공존하는 하나의 건축물이었다.

퇴계는 이 집에서 주옥같은 많은 시를 지었다. 계곡 입구라는 뜻으로 곡구암, 멀리 동쪽 푸른 언덕은 동취병, 그 뒷산은 부용병이라 하였다. 단지 이름을 짓는데 그치지 않고 자연을 노래하며 사계절의 변화에 맞춘 시를 지었다. 도산서당은 세 칸의 작은 집이 아니고 뒷산과 앞내를 아우르는 거대한 자연을 건축 공간으로 승화시켰다. 이런 공간속에서 퇴계는 성리학자로 시인으로 건축가로 자신의 학문을 키우고 영혼을 살찌웠다.

도산서당을 돌아보며 집이 어떻게 지어져야하고, 집이 그 속에 사는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받는지 일깨워 준다. ‘사람은 도시를 만들고 도시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급격한 변화의 물결 속에서 시시때때 도시로 사람들이 모여든다. 건축학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집 한 채에도 영혼과 자연을 담고자 노력한 선비정신이 새삼 그리운 요즘이다.  

정관영 공학박사・우석대학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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