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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목숨과 바꾼 독립선언서 낭독

정관영 공학박사·우석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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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9.03.10 17:07
  • 기자명 By. 충청신문
정관영 공학박사·우석대 겸임교수

덕성여대 출장길에 담 하나사이로 조선말에 흥선대원군이 거처했던 운현궁이 자리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한옥은 관점에 따라 그 의미가 크게 다르다. 명성황후와 흥선대원군이 영욕의 시대를 마감하기 전 두 인물의 숨결을 함께 느낄 수 있는 곳이 운현궁이기 때문이다.

풍광을 유지하기 어려운 도심에서 궁궐 목수의 섬세한 손길이 느껴지는 전통 한옥이 서울 심장부에 남아 있다는 사실은 퍽이나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운현궁은 당시 왕이 집무를 하던 창덕궁과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어, 대원군은 운현궁에서 창덕궁의 담장에 전용 문을 만들어 출입하였다고 전해진다.

대원군의 개혁이 성공하여 조선이 자주적인 새 나라로 바로 설 수 있었더라면, 운현궁은 우리 역사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사에서 큰 의미를 지닌 명소로 부각되었을 것이다. 불행히도 대원군이 자주적인 개화를 통한 부국강병을 이루어내지 못함으로써, 운현궁은 우리 민족에게 회한이 가득한 여운으로 남는다.

대원군이 10년 집권 후 실각한 1874년부터, 한반도는 독립적인 국가 유지가 어려워지고 끝내는 식민지로 이어 분단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마침 100주년을 맞는 뜻깊은 삼일절이기에 덕성여대 인근에 있는 탑골공원으로 향했다. 탑골공원에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하여 1세기의 3·1독립운동 발화지의 위상을 여실히 보여주는 듯 했다.

탑골공원은 브라운이 서울에 근대식 공원으로 조성한 첫 번째 공원이다. 이곳에는 고려시대부터 흥복사라는 절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원각사 10층 석탑과 비만 남고 사찰 건물은 보이지 않는다. 파고다공원이라고도 불리면서 우리역사에 한 획을 그은 것은 이곳이 3·1독립선언식이 거행된 장소라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죽음과 바꾼 독립운동가와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그 한 사람의 목소리가 다시 들리는 것 같아 숙연한 마음으로 탑골공원을 찾아가게 되었다.

3·1독립선언식의 당시 계획은 학생들과 원로 33인이 같은 자리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민족대표가 직접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탑골공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태화관에서 손병희 등 29인이 33인 명의로 된 독립선언문를 선포하였다.

독립선언식은 한용운이 한국 및 한국인이 독립국임과 자주민임을 선언하고 그의 선창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일제히 불렀다. 그리고 그들은 생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축배를 들며 비장한 각오로 오직 조국의 앞날에 영광 있기를 빌었다. 그리고 자진해서 경찰서에 연락한 후 체포되어 남산에 있는 왜성대 경무총독부에 수감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날 오후 2시부터 탑골공원에 모이기 시작한 시민과 학생들은 이러한 정황을 알 수 없었고, 그 수는 점점 불어나 5000여 명에 달하게 되었다. 예정대로 민족대표인 손병희가 나와 독립선언서를 낭독할 것이라 생각하고 모두들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다 되도록 민족대표들은 끝내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내가 나서서 내처 읽어버릴까. 민족 대표들도 유혈 사태를 우려하여 태화관으로 독립 선언 장소를 바꿨는데 혹여 내가 감당 못할 사태가 정말로 발생하면 어쩌나. 아무 것도 아닌 시골 전도사인 내가 독립 선언서를 읽으면 군중들이 어떻게 반응할까. 잡혀가면 어떻게 될까. 일제의 처지에서 반역을 꾀하는 셈인 데 내 인생은 어떻게 될까.

정재용의 고민에 백번 공감을 하면서 풍전등화의 조국을 상상하게 된다.

하늘이 도운 것일까? 민족대표는 탑골공원에 나타나지 않았다. 정재용은 나눠 주고 품속에 간직했던 한 장 남은 독립선언서를 들고 탑골공원의 단상에 올라가 낭독하기 시작하였다.

“에... 吾等(오등)은 玆(자)에 我(아) 朝鮮(조선)의 獨立國(독립국)임과 朝鮮人(조선인)의 自主民(자주민)임을 宣言(선언)하노라. 此(차)로써 世界萬邦(세계 만방)에 告(고)하야…”

어린 학생들은 무리를 이뤄 만세를 외쳤고, 노인들도 지팡이를 들고 만세를 외쳤다. 그야말로 울분과 ‘조선’이라는 나라이름을 크게 외치는 감격의 한마당이 열린 것이다.

실로 하나뿐인 목숨을 독립선언서 낭독과 바꾼 것이다. 치열한 불꽃이었다. 결국 만학도인 시골 전도사 정재용은 팔각정 위로 올라가 품 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낭독함으로써 3·1운동은 전국방방곡곡에 노도와 같이 이어지게 된 것이다. 한마디로 3·1운동은 현대 대한민국을 세운 초석이다. 헌법 전문에 3·1운동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중국의 혁명가인 천두슈(陳獨秀)의 말대로 3·1운동은 “위대하고, 간절하며, 비장한 동시에 명료하고, 정확한 관념을 갖추어 민의를 사용하되 무력을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세계 혁명사의 신기원을 열었던 일대 사건”이었다고 극찬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30여 년 전 조상들이 목숨을 내놓고 외친 3·1독립만세운동이 100주년을 맞았으니 무한한 감격으로 조국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3·1운동 당시 젊은이의 정재용에게 조국은 무엇이었나. 조국은 그의 존재 이유였고 모든 것이었다. 

국기게양대에 높이 걸린 태극기를 바라보며 ‘보고 있어도 그립다’는 말처럼 태극기가 다시 그립고 가슴이 뛴다.

선혈들의 비무장평화운동인 숭고한 3·1정신을 기리며 독립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태극기 게양 기간’을 늘여 온 나라를 태극기 물결로 수놓아 국민총화를 이루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 

또한 서울에서 펼쳐지고 있는 ‘100년 만세길’의 울림이 독립과 자유를 외치는 소리를 따라 전국토의 길이 ‘만세길’로, 우리 국민 모두가 ‘만세인’으로 거듭 태어나길 소망해본다. 

하나뿐인 생명을 하나뿐인 조국을 다시 찾고 세우기 위해 바친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애국지사를 향해 겸허히 머리를 숙인다. 이 순간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위대한 내 조국을 뜨겁게 가슴에 안아보는 3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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