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금성 관련기록을 보자. 조선 영조 때부터 헌종 연간에 편찬된 ‘충청도읍지’에는 1399년 신금성에 있던 읍치(邑治)가 결성읍성으로 옮겨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결성현지’에는 1397년(태조6년) 신금성으로 읍치를 옮기고, 다시 1400년에 현재의 결성읍성으로 옮겨진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들을 보면 14세기 후반까지는 신금성이 읍성으로 존재했던 것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런데 1989년, 1990년, 1992년에 거쳐 신금성에서 백제의 삼족토기와 중국의 전문도기편(錢文陶器片)이 다량 출토되었다. 삼족토기는 백제 초기부터 말기까지 사용되었던 주요토기이자 백제 전기인 한성기를 대표하고 있다. 삼족토기의 출토양은 몽촌토성과 풍납토성, 그리고 공주・부여 등 내륙지역과 홍성지역 순이다. 남해안에서는 5군데 6점만 발견되는 반해 신금성에서는 67점이나 출토되었다.
한편 전문도기는 중국 한무제 때 처음으로 주조한 화폐문양이 찍혀있는 것으로, 중국 서진(265~316년)에서 유행한 오수전문이며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에서만 출토되었다. 전문도기편이 신금성에서 출토되었다는 사실은 홍성의 재지세력이 4세기까지 서진 등과 직접 교류하였음을 뜻하기도 한다.
일찍이 이병도는 ‘진서’에 나타나는 동이마한의 신미국(新彌國)이 “주에서 4000여 리이며 산을 두르고 바다에 접해있다”고 했으므로 중부서해안에 위치한다고 하였다. 신미국은 ‘삼국지’ 마한 54개국에는 기록이 없는 소국으로 이병도의 설을 따른다면 신금성일 확률이 높다. 신금성 앞에는 홍성방조제가 축조되기 전에는 바닷물이 들어온 곳으로 천수만을 통해 중국과 교류하기가 용이한 곳이며 출토된 오수전문이 그를 입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7세기에는 백제 부흥을 꿈꾸며 홍성군 장곡면 주류성에서 나당연합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부흥군들의 처자들이 거처하던 곳이었다. ‘일본서기’에 나오는 침복기성이다. 결국 백제 부흥의 꿈을 접어야 했던 백제 유민들이 신금성으로 와서, 처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Boat people이 되어 망국의 한을 품고 일본으로 떠나야 했던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고대마한의 소국이었던 신미국이자 7세기 침복기성이었던 신금성을 찾기 위하여 팔순이 넘은 향토사학자 황성창 선생의 안내를 받아야 했다. 그는 신금성 발굴 필요성을 최초로 제기하였고 발굴 당시에도 깊이 관여한 분으로 여느 사학자 못지않은 식견을 갖고 계신 분이셨다. 그분이 아니면 신금성의 위치조차도 찾을 수 없을 뻔했다.
그러나 함께 찾아간 신금성은 어느 문중의 묘지와 비석들이 즐비하고, 일부는 농작물이 경작이 되고 있어 역사적인 흔적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안내 간판도 단지 발굴현황과 백제 토성이었음만을 전하고 있었다. 다행히 결성면 소재지에 있는 결성농요농사박물관에서 발굴 후 버려진 몇 몇 토기 조각들을 보며 추가적인 설명을 들어야 했다. 그런 어르신 다음 세대는 누가 이런 현장을 설명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충남기념물 149호로 지정되어 있지만 방치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서해안 시대를 주도하는 충남도 차원의 신금성 스토리텔링과 함께 역사적 의의를 새겨보게 할 대안이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