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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의 날 기획-대전역의 역사] 즐거운 대전 여행의 출발점 ‘칙칙폭폭’

첫 지하차도 준공부터 대표 교통중심지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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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9.06.27 19:20
  • 기자명 By. 최홍석 기자
2019 대전역 전경
2019 대전역 전경

 

1904년 운행 시작… 10년 후 정식 개통
한국전쟁 겪으며 역 파괴… 1959년 재건
전쟁의 숨겨진 영웅 김재현 기관사 등 역사 깊어

[충청신문] 최홍석 기자 = 대전의 상징과도 같은 대전역은 1904년 11월 3일 승객 운행을 시작으로 그다음 해 경부철도와 10년 뒤인 1914년 호남철도의 보통역으로 정식 개통됐다.
조용하던 시골 마을인 대전리가 삼남 철도의 분기점으로 새로 태어나는 순간인 것이다.
최초의 대전역사 건축은 1904년에 지어진 경부철도의 간이정거장이다.
이 때 대전역은 목조 단층의 초가에 처마를 매단 일본식 가설건축물 구조를 띠고 있었다.
이 시기를 지나 대전역을 신설하면서 대전에 일본인들의 거주지가 생기고 일본 철도공사 종사자들이 대전역 주변에 집단으로 거주하기 시작하면서 날이 갈수록 인구가 늘어났다.

1. 한국전쟁당시 대전역 (사진=대전시립박물관 제공)2. 1958년 8월 대전역 낙성식(사진=대전시립박물관 제공)3. 1977년 9월 대전역 전경(사진=대전시 제공)4. 1997년 6월 대전역 전경(사진=대전시 제공)
1. 한국전쟁당시 대전역 (사진=대전시립박물관 제공)2. 1958년 8월 대전역 낙성식(사진=대전시립박물관 제공)3. 1977년 9월 대전역 전경(사진=대전시 제공)4. 1997년 6월 대전역 전경(사진=대전시 제공)

 

이후 일제강점기인 1918년에 대대적인 역사 개축을 통해 대지면적 7만2867평의 2층 건물이 들어섰다.
건물면적이 280여평, 공사비는 6만원 정도로 당시 규모에서는 대형공사로 볼 수 있다.
당시 지어진 대전역은 1915년에 개축한 대구역과 유사한 형태를 띠고 있는데 이는 철도 도입기에 설치된 표준설계에 의한 신축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1918년에는 우리나라 철도역사 최초로 대전역 지하차도를 준공했다. 일제강점기 대전역의 개통에는 두 가지의 상반된 시선이 존재한다.
첫 번째는 대전이 증기기관차라는 신문물로 인해 각종 산업기반시설이 개발되면서 시골 과수원에 불과하던 대전리가 신흥 도시로 발전됐다는 의견이 있다.
다만 이 관점은 일본의 신기술이 근대화의 원동력이 됐다는 식민지근대화론은 근거로 한 관점이다.
두 번째는 일본제국주의 전쟁의 교두보로 활용돼 징병, 징용, 공출 등 침략과 수탈의 도구였다는 관점이다.
실제로 철도시설은 독립운동가의 주요 테러대상이었으며 일본은 철도시설을 지키기 위해 역 주변에 헌병대를 배치하기도 했다.
1907년에는 의병 30여명이 대전역과 기차를 습격했는데 일본인과 조선인 12명이 사망, 150명이 중상을 입은 큰 사건이었다. 또한 1920년대 대전역 부근에 철도 관사촌과 각종 시설물이 생기면서 대전의 아름다운 호수였던 소제호가 사라져버렸다.
일제강점기를 지나 대전역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파괴되기 이른다.
1950년 9월 29일 대전은 연합군에게 탈환되는데 그 직전에 북한군 거점기지를 폭격하면서 대전역이 같이 소실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부서진 대전역은 1958년 착공해 이듬해인 1959년에 준공됐다.
새로 지어진 대전역은 전쟁복구기에 건설된 대표적인 현대식 구조의 역사로 평가받고 있다.
20세기를 지나 2003년에는 대전역은 신역사 준공을 통해 지금의 모습과 비슷한 모습으로 바뀌게 된다.
이듬해인 2004년에는 고속철도인 KTX가 운행을 시작하면서 서울과의 거리가 1시간으로 줄어들었고 이에 중부권 교통 중심지의 역할이 더욱 강화됐다. 
2017년에는 리모델링 공사를 통해 종전 2507㎡에 불과하던 대합실 면적이 6422㎡로 2.5배로 늘어나게 됐다.
또한 기존의 대합실에 위치하던 사업시설 또한 4층으로 이전해 기차를 이용하는 승객들의 편의성이 크게 향상됐다.

기적을 울리는 사람들 동상 (사진=최홍석 기자)
기적을 울리는 사람들 동상 (사진=최홍석 기자)

 

나라 지킨 열차이야기 ‘기적을 울리는 사람들’

한편 대전역 동광장의 한켠에는 28세의 젊은 나이에 순국한 김재현 기관사와 현재영, 황남호 보조기관사를 형상화한 ‘기적을 울리는 사람들’ 동상이 있다.
그들은 한국 전쟁 당시 대전기관차 사무소 소속으로 1950년 7월 19일 대전전투에 미군 24보병사단과 함께 열차수송작전에 참여했다.
이는 북한군에 포위된 미군 사단장을 구출하기 위한 작전으로 당시 어렵게 포위망을 뚫고 대전에 도착했으나 김재현 기관사는 적군에 8발의 총탄을 맞은 후 순직했다.
한국 대중문화에서 1960년~70년대의 대전역은 빼놓을 수 없는 단골 소재로 등장한다.
특히 1956년에 발표된 ‘대전 부르스’는 대전역을 배경으로 이별의 아픔을 그리고 있는 곡으로 애절한 가락으로 헤어지는 사람들의 비통한 심정을 잘 담아내고 있다.
자정이 넘은 새벽에 대전에서 목포로 향하는 완행열차가 중심 소재이며 가사 중 ‘떠나가는 새벽 열차 대전발 0시 50분’ 부분이 유명하다.
이 노래의 가사를 담은 영화도 1963년에 만들어졌는데 그때도 ‘대전발 영시 오십분’이라는 제목이 붙었다.
노래만큼 유명한 것이 또 하나 있다.

대전역의 명물 가락국수 (사진=최홍석 기자)
대전역의 명물 가락국수 (사진=최홍석 기자)

 

열차 대기시간을 책임진 역의 명물 ‘가락국수’
대전역 ‘가락국수’는 예로부터 대전역의 승강장에 설치된 식당에서 파는 명물로 유명하다.
가락국수가 유명해진 데는 그 당시 경부선과 호남선의 분기 구조에서 기인하는데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는 호남지역 곡물을 부산으로 이동시켜 수탈하고 있었다.
일본은 이러한 수탈을 원활히 하기 위해 경부선의 대전역에서 부산 방향을 향하도록 호남선을 부설했다.
당시에는 서울에서 호남선을 이용해 내려가려면 현재와는 달리 대전역까지 갔다가 기관차의 방향을 반대로 바꿔서 가야했기에 오랜 시간이 소요됐다.
그 때문에 대전역에서 잠시 내린 후 승강장에서 가락국수를 먹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자연스레 가락국수는 대전역의 명물로 자리 잡았다.
대전이라는 도시의 시작이자 추억을 간직한 대전역, 대전방문의 해를 맞아 처음 사람들이 만나게 되는 관문이 될 대전역이 대전 여행의 좋은 시작점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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