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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삶의 선율

정관영 공학박사 우석대 건축학과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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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9.09.29 14:23
  • 기자명 By. 충청신문
정관영 공학박사 우석대 건축학과 객원교수
정관영 공학박사 우석대 건축학과 객원교수

우리가 사는 요즘 세상은 너무 각이 지고 메말라 왠지 모르게 불편한 불신과 분노로 가득 차 있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의 삶이 마치 비오는 날의 수채화 같이 녹아내리고 있다. 늘 보금자리가 되어야 하는 가정도 정원이기보다는 정글이 되어 가고 있다는 느낌마저 든다. 인테리어로 장식하고 좋은 시설을 갖추고 살면서도 가족 간의 대화는 단절되고 저마다 외로운 배 한척이 되어 망망대해에서 떠도는 상황이다.

어느 심리학자는 가정은 빙산과 같다고 비유한다. 바다 밑에 큰 얼음덩어리가 깊이 잠겨 있듯이, 우리네 가정들도 겉보기는 평온하고 행복한 듯하지만, 그 속사정과 내면에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가정은 축복과 행복을 주고자 세운 원초적 공동체이다. 그럼에도 걱정 없는 가정은 없다.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이 자기 몫이 아님을 깨닫고 운명인양 체념하고 산다.

우리가 운명을 두려워하고 바꾸지 못하는 것은 거대한 산처럼 우리들의 앞을 짓누르며 위압하고 있는 운명의 모습에 질려 그 실상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볼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운명이란 호박씨를 심으면 호박이 나고 오이씨를 심으면 오이가 나는 것과 같다. 운명은 바로 자기 자신이 타고난 근본바탕에 의해 지어지는 현상이다. 호박씨가 호박의 모습을 벗어날 수 없듯이 인간도 자신이 지은 업에 의해 지니고 태어나는 근본바탕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세상이 이것으로 그치거나 이것만으로 영원히 맴도는 것이라면 살아갈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운명이란 고정적인 것도 유동적인 것도 아니다. 운명에 대한 일은 마치 씨를 뿌리고 밭을 매는 농사일과 같다.

우리는 저마다 타고난 자질을 환경 속에 뿌려 자신이 그 동안 수고롭게 고심하며 지은 삶을 운명으로 지니고 있다.

농사를 지어보면 똑같은 씨앗이라도 척박한 환경에 뿌리내린 것은 그 결실이 적고 쭉정이가 많다. 기름진 땅에 뿌려진 것은 씨알이 굵고 풍성하다. 그러나 아무리 씨앗이 좋고 기름진 땅이라고 하더라도 농부의 땀 흘리는 정성이 없이는 풍년을 기약할 수 없다.

“씨를 뿌리는 자가 그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릴 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 버렸고,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 떨기 속에 떨어지매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고 성경에도 인과(因果)의 이치를 알려주고 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각자가 메고 다니는 운명자루가 있다. 그 자루 속에는 사람마다 각기 똑같은 수의 검은 돌과 흰 돌이 들어있다. 우리가 검은 돌을 꺼낼 때는 불행을 꺼내고, 흰 돌을 꺼낼 때는 행운을 꺼낸다고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은 예측할 수 없는 이 돌들을 하나씩 꺼내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사람은 자루에서 돌을 꺼낼 때마다 흰 돌만을 꺼내는 사람도 있다. 그 사람의 자루에는 검은 돌이 더 많이 남아 있는데도 분수를 모르고 럭비공 같기도 하다. 혹자는 돌을 꺼낼 때 마다 검은 돌만 꺼내는 사람도 있다. 그러다 보면 검은 돌을 너무 많이 꺼내서 자루에는 흰 돌이 더 많이 남게 되어 이제부터는 행복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일로 음해를 당하기도 하고 궁지에 몰려 주홍의 굴레에서 신음하기도 한다. 심지어 역경에 처하면 이를 참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환란에도 차분하게 자신을 돌아보아야겠다. 저주하고 힘들게 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며 꽃나무를 심는 여유가 있다면 영성이 아름답게 꽃필 것이다.

우리가 행복하지 않은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감사하기보다,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탐내기 때문이다.

행복 하고 싶다면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과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 행복의 씨앗을 내 스스로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행복은 향수와 같다. 자신에게 먼저 뿌리지 않고서는 남에게 향기를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어렵다고 포기하지 말고 잘 나갈 때 더 조심하고 자기관리를 잘 해야 할 일이다.

얼마 전 비바람이 몰려오는 태풍예보에도 함양골프고등학교와 학다리고등학교의 교육시설사업종합평가를 위해 함양에 간 일이 있다. 일행보다 시간 반이나 일찍 도착하여 함양 시내를 돌아보고 함평교회를 지날 무렵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단벌 차림에 비를 맞으면 곤란한 상황인데 때마침 누군가 쫒아와 우산을 건네주는 것이 아닌가. 고마운 마음에 목사님이냐고 물었더니 전도사라고 했다. 우산의 값이 문제가 아니라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선을 베푼 그 귀한 마음이 두고두고 잊을 수 없는 태풍속의 추억이 되었다.

시국이 어렵지만 이렇게 선한 사람들이 곳곳에 있어 사회가 이어진다고 생각하니 빗방울을 세며 마음의 위로를 받았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길다고 알려진 북아메리카의 로키산맥이 있다. 이 산맥의 해발 3000미터의 높이에는 수목 한계선이라는 지대가 있다. 나무가 살 수 있는 한계선이다.

이 지대의 나무들은 너무나 매서운 바람 때문에 위로 곧게 자라지 못한다. 마치 사람이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을 한 채로 살아간다고 한다. 고개를 들고 서 있다가는 눈과 바람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즉시 부러져 나무로서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이한 것은 세계에서 가장 공명(共鳴)이 잘 되는 명품 바이올린은 바로 이 ‘무릎 꿇은 나무’로 만든다고 한다.

나무에게 생각이 있다면 모진 눈보라를 견디는 그 과정 속에 수십 번이나 ‘차라리 죽어 버릴까’하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참고 견디다 보니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을 내는 나무로 성장할 수 있었다.

우리의 삶도 이와 다를 것이 없다. 고통 없이 살아온 사람에게 사람의 향기가 나지 않지만 깊이 있는 사람, 역경을 헤쳐 온 사람에게는 하늘이 내려주는 면류관이 그이 머리에 있다.

우리는 어쩌면 하루하루 온갖 매서운 바람과 눈보라 속에서 자신을 세워온 나무처럼 나름대로 있는 자리에서 순응하는 법을 배우고 익히면서 살아간다. 그래서 각자의 삶을 자신의 소리로 매일매일 연주하고 있다. 때로는 그 선율이 슬프기도 하지만 때로는 더없이 기쁘고 행복한 선율을 내어 이웃사람들에게 까지 삶의 보람을 전해주기도 하는 것이다.

가을 햇볕이 온 누리를 아름답게 물들이고 있다. 누렇게 익어가는 들판이 우리의 마음에 평화를 안겨준다. 익어갈수록 고개 숙이는 벼이삭에서 생의 지혜를 얻고 다가오는 겨울을 준비하려고 옷을 갈아입는 나무들에게도 소리 없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무엇보다도 높고 푸른 가을 하늘을 응시하며 메마른 우리의 마음도 다시 푸르러오길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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