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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가을과 휠체어

정관영 공학박사·우석대 건축학과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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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9.10.27 16:12
  • 기자명 By. 충청신문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퇴근길이었다. 휠체어를 탄 사람과 말끔하게 차려입은 신사가 어떤 이유인지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옆에 있던 사람이 “이봐 뭘 불쌍한 병신하고 시시비비를 가리나, 사람가치 떨어지게.” 하며 말다툼하던 신사를 끌고 갔다. 장애인은 당사자도 아닌, 말리는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에 더욱 비참한 표정이었다. 지켜보던 나도 당황하여 시선을 두기 어려운데 장애인은 즉시 고개를 외로 꼰 채 눈가가 붉어졌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장애인이 왜 불쌍하며 그런 사람과 시시비비를 가리는 게 왜 인격의 가치가 떨어진단 말인가. 오로지 값싼 동정심으로 불쌍하다는 생각, 이것이 사회의 통념이라면 모순이 아닐 수 없다. 나는 그 휠체어에 탄 사람이 좀 더 당당했으면 했는데 그 신사와의 시비를 체념한 듯한 나약한 태도가 못내 안타깝기도 하였다.

사람마다 지위나 부귀에 관계없이 누구나 인격적으로 대접 받고 살 수 있는 사회야말로 사람들이 가장 소망하는 낙원이 아닐까. 그러나 이런 꿈은 칸트의 이상론이 될지언정 현실로는 그 실현이 불가능하기도 하니 언제나 이런 사회적 편견과 그늘에 접할 때마다 마음이 무거워 오는 것이 사실이다.

인간이 서로 상대의 인격을 존중하지 않고 무시하고 무시당하는 서글픈 현상이 일어나는 것도 어찌 보면 한치 앞도 헤아릴 수 없는 나약한 인간의 허세가 아닌가 싶다. 순탄치 않은 세상을 살다보면 우리 자신도 언제나 장애인이 될 수 있음을 잊고 있으니 말이다.
오늘 내가 본 겉만 번지르르한 신사의 모습이 어쩜 우리의 자화상은 아닌지 되돌아보며,

잊혀 지지 않는 감동적인 한 장면이 떠오른다.

모 방송국에서 전국 가요제전 프로그램으로 ‘사랑의 노래 마음의 노래’를 방영한 일이 있다. 그 프로는 나의 가슴에 진정한 인간애의 참된 의미와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계기를 안겨주었다.

휠체어에 간신히 몸을 의지한 어느 지체부자유자는 장애인에 대한 사회의 냉대와 선입견, 모진 풍파 때문에 세상이 험하고 무섭다고 토로했다. 그러나 그가 ‘세상이 아름답다’고 마음을 바꾸어 긍정하기까지는 ‘사랑하는 당신’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어서 출연한 농아 부인의 입에서 ‘말을 하는 사람은 믿을 수 없다’고 한 고백은 실로 마음을 우울하게 했다. 정상인인 우리들을 그들은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사지가 멀쩡한 내가 갑자기 그들 앞에 부끄러웠다.

교통사고로 지체부자유자가 된 30대 중반의 출연자는 합병증으로 신장까지 손상되어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다. 어느 독지가가 나서서 기꺼이 신장을 기증하겠다고 했지만 끝내 그는 사양했다. 귀중한 장기가 있으면 자신보다 희망이 있는 다른 사람에게 이식하도록 해 달라고 애원하며 호소하는 모습은 진한 감동이었다.

뇌성마비로 신음하는 어느 지체아의 절규, 손을 맞잡은 시각장애인 부부의 열창, 목발에 온몸을 의지한 지체장애인의 열창, 그들은 냉혹한 현실을 운명으로 겸허하게 받아들이며 저마다의 가슴속에 맺힌 한을 토해내고 있었다.

자신들의 열등감과 사회의 편견을 한꺼번에 씻어 버리기라도 할 듯 온몸과 영혼으로 노래하면서 당당한 사회의 일원으로 대우받고 싶어 하는 의지의 표출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릴 것이다.

그들이라고 어느 누가 장애인이 되고 싶었겠는가. 어쩌다 운명의 덫에 걸려 선천적으로 장애인이 된 사람도 있지만 교통사고나 불의의 사고를 당한 장애인도 적지 않다. 우리는 장애인과는 전혀 거리가 먼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불확실한 현실 속에서 누가 장애인이 되지 않는다고 감히 장담할 수 있겠는가.

비록 장애인들이지만 그들도 우리와 다를 바 없는 가슴에 뜨거운 피가 흐르는 인간인 것이다. 평소 우리는 장애인들을 위해 과연 얼마나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가. 외형적으로는 떠들썩하게 요란하면서도 속으로는 마음의 장벽을 쌓고, 진정으로 마음을 나누기보다는 우선 거리감을 갖지 않았던가. 마음에 내키지 않은 포장된 진실, 선심이 오히려 그들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하지 않았는지 돌아 볼일이다. 그들에겐 무엇보다 진정으로 위해주고 더불어 살아간다는 공동체 의식을 부여해주고 평등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본다.

모든 인간은 어김없이 장애를 겪어가며 살고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우리 주위에는 ‘육체적인 장애’를 가지고 사는 이들, ‘영적인 장애’를 지닌 이들, ‘두 가지’를 함께 지니며 살아가는 부류의 장애인들이 존재한다. 그중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육체적인 장애를 가진 자만이 장애인으로 알고 그들에 대해 우월의식을 갖고 하대하거나 멸시한다. 저희들만 고고한 채 사는 부류의 장애인들이 있다. 이들은 마치 질곡의 세계에서 사는 사람들과 같이 함께 지내기를 결코 꺼려하며 다 같이 돌보아 주어야 할 어떠한 해도 끼칠 일이 없을 선의의 장애인들을 위한 시설이 들어서는 것을 갖은 핑계를 대며 막무가내로 물리력을 동원해 저지하고 혐오를 한다.

알고 보면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장애를 지니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정신적인 불구자, 인격의 불구자, 교양의 불구자, 지식의 불구자 등, 자신들의 불구는 인식하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불구만을 업신여기는 편견은 없어져야 할 것이다.

두 팔을 잃었지만 의수로 그림을 그리며 세계 최초로 '수묵 크로키'를 창시한 석창우 화백이 있다. 그는 두 팔을 잃고 삶이 뒤바뀌었다며 하나님이 기적을 경험하게 하셨다고 고백한다. 숱한 위기 속에서도 당신과 동행하며 2015년부터 지금까지 성경필사에 도전하고 있다. 그가 전기기사로 일하던 30대에 고압 전류에 감전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사고로 인해 석 화백의 두 팔은 까맣게 타 들어가고 발가락 두 개는 절단됐다. 이후 석 화백의 두 어깨엔 플라스틱 의수가 끼워졌다.

석 화백이 그림을 그리게 된 계기는 우연찮게 찾아왔다. 수술과 재활치료의 시간을 보내던 중 네 살배기 아들이 ‘그림을 그려 달라’는 말 한 마디가 그의 인생을 뒤바꿔 놓았다.

네 살밖에 되지 않은 아들에게 무엇이라도 해주고 싶어 그림책을 펴 독수리와 참새 등 동물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아들이 너무 좋아하더라는 것이다.

석 화백이 그린 그림은 점차 주변을 놀라게 했다. 정작 두 팔이 있었을 때 몰랐던 재능을 두 팔을 잃고 나서 발견하게 된 것이다. 석 화백은 아내와 친척들이 그림을 배워보란 권유에 화실 이곳저곳을 찾아갔다. 하지만 두 팔이 없어 물감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없다는 이유로 화실에서 거부당했다. 그는 오기로 시작했지만 의수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의수의 끝이 갈고리 모양으로 되어 있어 붓을 잡기조차 어려웠다. 그래서 직접 붓에 구멍을 뚫고, 발로 먹을 갈며 서예를 배우기 시작했다. 날을 새는 것은 물론 피땀을 흘려가며 서예에 몰두했다. 서예로 새롭게 시작된 그의 삶은 천신만고 끝에 서예를 시작한 지 3년이 되던 해에 빛을 발했다. 1991년 전라북도 서예대전을 시작으로 대한민국서예대전, 대한민국현대서예대전 등 곳곳에서 상을 휩쓸었다.

특히 지난 2014년 소치 장애인겨울올림픽 폐막식에 펼쳐진 석창우 화백의 퍼포먼스는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는 두 팔이 아닌 의수로 짧은 시간 안에 올림픽 선수들의 역동적인 모습을 단 2분 내외에 그리며 자신의 기량을 온 세계에 전했다.

요즘 석창우 화백은 성경필사에 빠져있다. 2015년 61세가 되던 해부터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25m 두루마리 화선지에 성경필사를 하고 있다.

이렇듯 장애인 중에는 극기하며 사회의 귀감이 되고, 고고한 명성을 얻은 사람들도 많다.

우리 고장의 운보 김기창 화백은 언어 및 청각장애에도 불구하고 동양화단의 거목으로 추앙 받는 인물이 되었다. ‘헬렌켈러’나 ‘루스벨트’대통령도 장애를 극복하고 세계에 그 이름을 떨쳤다. 우리 주변에는 사회에 기여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장애인들도 다수 있다. 그들에게 응원을 보내며 희망과 용기를 주는 따뜻한 사회의 품이 절실한 때이다.

누가 진정 장애인인가?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낙엽이 쌓인 미끄러운 길을 휠체어 탄 사람이 지나가고 있으면 살짝 밀어주며 함께 걸어갈 일이다. 정상인이라고 자처하는 내가 불현듯 가슴에 손을 얹게 되는 가을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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