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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세평] 명함 정리

김정호 백제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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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9.11.06 15:02
  • 기자명 By. 충청신문
명함을 정리한다. 얼굴이 떠오른다. 이 사람은 지금은 무엇하고 계시는지? 명함첩에 넣는다. 내가 받은 명함이 이리 많을 줄이야. 명함 여백에 나는 만난 날짜, 장소, 연령 또는 관계를 메모해 왔다. 그런데 메모가 없는 것도 많다. 누군지, 언제, 왜 만났는지 전혀 기억에 없는 것이다. 나와 관련 없는 것들, 버린다. 쓰레기통이 차서 비운다. 버려지는 명함을 바라본다. 사람을 버리는 것 같아서 미안하다. 분명히 만나서 직접 받았을 터인데, 그 이후로 교류가 없는 사람들이다. 나도 무수히 많은 명함을 내밀었다. 누군가에게는 내 명함도 이렇게 버려지겠지. 아는 사람끼리는 명함을 주고받지 않는다. 처음 만나는 사람끼리 서로 연락하자는 뜻을 전하는 거다.

회사에 입사하면 명함을 만들어준다. 첫 명함을 받은 느낌은 감격이었다. 회사 로고가 들어간 신입사원의 명함, 조직의 일원이 된 자부심이 충만했다. 그동안 부서가 바뀔 때마다, 직급이 오를 때마다 명함을 만들었다. 한 묶음 200장을 다 써서 두세 번 만든 적도 있다. 그러고 보니 모든 게 명함 생활이었다. 거래처를 방문했을 때 상대방이 부재중이면 명함을 놓고 나온다. 명절 선물을 보낼 때 명함을 넣어 보낸다.

명함은 자신을 설명하는 역할을 한다. 영업사원은 고객과 거래를 트기 위한 필수 수단으로 활용한다. 비즈니스 관계로 처음 만나는 사람과 명함을 교환하는 것은 기본중의 기본이다. 기업명함은 홍보효과가 크다. 기업마다 통일된 매뉴얼이 있다.

명함을 챙기지 못하면 난감하다. 명함 하나 못 챙기는 덜렁이, 첫 인상이 호감일 리 없다는 자격지심이다. 명함케이스, 명함지갑을 별도로 품격인 양 들고 다녔다.

외국에서는 주로 이름만 적어 놓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이름 외에 주소, 전화번호, 직장, 직위 등을 표기한다. 자격증, 학위, 이메일, 홈페이지, 카페 주소도 적는다. 앞으로 알고 지내야 할 필요가 있는 사람에게 자신을 알려주는 좋은 기능을 갖고 있다. 냉장고 수리 기사 명함이 냉장고 붙어 있다. 고장 나면 급히 연락할 수 있다.

명함은 은연중 자기과시나 숨은 갑질 역할을 하기도 한다. 대표, 회장, 기관장은 기를 죽인다. “여기저기 박사가 널려서, 석사는 명함도 못 내밀어” 명함을 내밀어야 어떤 특정집단에 자기의 존재를 드러내 보일 수 있는데, 명함도 못 내미는 것은 상대방의 수준이나 정도가 너무 대단하여 견줄 바가 못 된다는 말이다.

명함은 다양하다. 크기, 두께, 재질, 컬러, 글씨체가 자유분방하다. 보통은 종이이지만, 카드도 있다. 종이 명함은 가로 90㎜, 세로 50㎜가 표준이다. 카드 명함은 가로 86㎜, 세로 54㎜가 표준이다. 정사각형, 직사각형, 코팅, 은박, 돋보기 형, 점자 명함도 있다. 퇴직기념으로 골드명함을 주는 회사도 있다. 순금 반 돈, 한 장짜리이지만 그만큼 기여한 공로에 대한 인정이다.

음식점 계산대에는 명함이 비치되어 있다. 필요한 사람이 가져간다. 메뉴, 찾아오는 길이 적혀 있다. 자기 이름 석 자만 한 가운데 딱 박힌 명함이 눈에 띈다. 자신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의 특권이다. 설명이 필요 없는 대가였다. 어느 경찰이 건넨 명함에는 “무단횡단, 길 위에 버려진 당신의 양심입니다”라는 글귀가 새겨 있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헌법 제1조 2항. 대한민국주권자 아무개”라는 명함도 있다.

요즘 명함은 한글이다. 한자를 쓰지 않는 게 오래 되었다. 한글세대가 읽지 못한다. 일반적인 명함 뒷면에는 영문이 표기되어 있다. 외국인을 상대하지 않는 일반인들에게는 불필요하다. 튀는 명함은 인상적이다. 그러나 과도한 장식은 안 좋다. 명함은 광고지가 아니다. 명료한 게 낫다.

반명함판은 3㎝×4㎝이다. 주민등록증, 자격증, 경로우대증, 지원서 등에 가장 많이 쓰이는 사진 규격이다. 증명사진, 여권사진, 사진 사이즈에 왜 “반명함판”이 끼어있는지 헷갈린다.

연말 모임이 시작되었다. 내년 총선도 시동이 걸렸다. 예비후보자들이 입구에서 인사를 하고 명함을 건넨다. 안 받겠다는 사람, 바쁘게 뛰어가는 사람에게 무리하게 주지 않는다. 청와대 행정관 출신은 왜 이리 많은가. 위원회, 단체는 왜 이리 많은가. 구태의연한 명함 인사는 정치 신인들에게는 답습할 수밖에 없는 방식이다. 법이 그것밖에 허용하지 않는다고 볼멘소리를 한다. 커리캐쳐, 학력, 직함을 수두룩하게 적어놓은 것을 보면 측은한 마음마저 든다. 스펙은 껍데기다. 얼마나 많은 껍데기 명함이 뿌려질 것인가.

우리 사회는 지나친 외피중심 구조다. 명함을 받으면 제일 먼저 눈길이 가는 곳이 직장과 직위이다. 명함을 받고, 줄 명함이 없는 사람은 괜히 뻘쭘하다. 친목 모임에서도 명함을 내미는 친구와 명함을 갖지 못한 친구로 나누어진다. 평생 명함을 만들지 않은 친구도 있다. 나이 먹고 퇴직 하고나면 가장 큰 변화는 명함이 없다는 점이다. 명함 없이도 불편하지 않은 삶을 살 수 있다. 명함을 쓸 일이 없는 사람, 직함이 없다고 초라한 삶은 아니다. 직함이 없다고 명함을 못 만드는 것도 아니다.

명함의 중요성은 예전보다 낮아졌다. 그러나 여전히 브랜딩을 할 수 있는 유효한 수단이다. 명함 공해다. 대한민국 명함을 다 모으면, 한반도를 몇 겹으로 덮고도 남을 거다. 요즘 대문 앞에는 대부업 일수 돈, 부동산, 개업 명함이 너저분하다.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면서 던진다. 주워서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도 만만치 않다. 이건 명함이 아니다.

참으로 많은 명함을 주고받았다. 정리하는 것도 일이다. 스마트폰 명함 정리 어플을 사용하라고 권한다. 그러나 하나하나 손으로 정리하는 것도 나름대로 재미있다. 명함마다 사연을 되새긴다. 타인의 명함을 정리하면서, 내 명함도 정리한다. 부끄럽지 않은, 착한 명함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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