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세상사는 이야기] 상실의 시대

목원대 교수·테너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입력 : 2019.12.17 15:00
  • 기자명 By. 충청신문
목원대 교수·테너
목원대 교수·테너
무라카미 하루키의 한국어판 소설 제목 얘기가 아니다.

‘공짜보다는 돈 주고 샀을 때 더 소중한 법이다.’

예전에 저작물의 효용성을 설명할 때 흔하게 들던 예로, 무단복사한 음원이나 불법 제본한 책보다는 자기돈 주고 산 CD 한 장이나 책 한권은 반드시 끝까지 다 듣고 읽게 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무단복사 한 것보다는 용돈 모아 산 것을 더 살뜰하게 다루게 되고 소장품이라는 개념으로 애착관계까지 형성되곤 했으니까.

필자도 예전에 샀던 CD들을 리핑작업을 거쳐 디지털 음원파일로 바꾸어 하드디스크에 장르별, 아티스트별로 저장하며 뿌듯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8년간의 유럽 유학시절에 2주마다 발매되던 오페라 시리즈를 사려고 발매날짜 맞추어 로마시내 가판대 구석구석을 뒤지며 사 모은 60여본의 VHS 테이프들은 가히 애장품이요 희귀 자료라 부를 만했다.

유튜브가 나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최근에 들어 생긴 스트리밍이라는 개념은 저작물의 소유개념마저 통째로 바꾸어 버렸다. 월정액을 지불하면 어디서나 무제한으로 음악을 골라듣고 영화를 보며, 심지어 커피마저 마실 수 있다. 어릴 적 기억 속에 봉인되어있던 가수를 어렴풋이 생각해내려면 3글자 이상의 단어만 입력하면 족하다. 그렇게 찾아낸 좋아하던 가수의 모르던 노래들과 버전별 녹음을 들을 수 있고, 매일의 기분에 따라 추천 키워드를 통해 미리 작성된 플레이리스트만 고르면 알아서 전문큐레이터들이 잘 만들어놓은 연주곡목이 순차 재생된다.

영화 쪽은 더 파격이다. 스트리밍이라는 실시간 전송체계로 저장용량도 필요하지 않은데다가 중간에 보다가 끊기면 다음번에 알아서 정지된 곳부터 재생한다. 그렇게 몇 번 보다보면 사용자의 영화감상 취향과 패턴까지 분석해서 ‘좋아할 만한’ 프로그램 추천도 해주는데 꽤 잘 맞는다. 감상평도 있고 추천순도 있으며, 방금 본 영화에 나온 배우의 다른 작품도 바로 추천해준다. 이게 다 예전 DVD 타이틀 한 장도 안 되는 가격에 가능한 얘기다.

월정액을 지불하면 손바닥보다 작은 스마트 기기에서 음악, 책, 영화가 쏟아져 나온다. 감상하다가 중단된 미디어는 집에 있는 다른 기계, TV나 PC로 끊긴 부분부터 다시 연동되어 재생도 가능하다. 책장도, DVD나 CD, 테이프를 보관할 진열장도 필요 없고, 구태여 음악을 찾아들으러 음반가게를 들를 필요도 없다. 내게 유학생활의 기념품처럼 남아있는 오페라 전집 VHS 시리즈를 보관하는 진열장은 이미 자리만 차지하는 애물단지로 전락한지 오래다. 심지어 거기에 수록된 것보다 더 나은 화질과 음질의 동일한 콘텐츠가 유튜브에 자막까지 곁들여 나온다. 소유경제에서 구독경제로 바뀌었다.

디지털 치매라는 개념이 있다. 스마트폰 같은 디지털 기기가 필요한 기억을 대신 저장해주는 바람에 사용자의 기억력이나 계산 능력이 크게 떨어지는 것을 말한다. 그러고 보니 예전엔 친구들과 가족들의 전화번호를 외우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지금은 외워서 전화걸 일이 없다보니 외우는 전화번호가 손에 꼽는다. 불현듯 가족의 전화번호를 되뇌어본다.

최근에는 영화 스트리밍 서비스에서 재밌어보이는 영화를 재생했다. 나름 영화광에, 식견이 있다고 자부하는 나로서는 그 영화제목이 도저히 기억나지도 않았던, 그러나 예전에 봤던 영화에, 심지어 별점까지 후하게 주었던 영화라는 걸 영화시작 10분이 지나서야 깨달았다. 너무 많은 영화를 본 탓이다.

직접 돈을 지불하며 수많은 영화와 음악과 책을 소유했지만 그조차도 다양하고 끊임없는 소비성 자극에 불과해 단기기억에 그쳐버렸다. 좋아하는 드라마를 보고나서 그 다음 주 회차까지 온갖 상상력과 기대감으로 한주를 상상하며 기다리던 드라마의 배경음악과 주인공들은 지금도 생생한데, 한 시즌을 연속으로 볼 수 있는 최신 시리즈는 수년 후 다시 보니 이런 씬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장면 장면이 새롭다.

분명 많이 가졌는데 남아있는게 없다.

소유할수록 잃어가는 상실의 시대다.

쉽게 얻을 수 있는 것들은 금방 잊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손 때묻은 책 한권이 더 애틋하고, 7.1채널의 고가장비로 감상한 세계적인 연주단체의 디지털 스트리밍 콘텐츠보다 시간과 발품 팔아 공연장의 공기를 피부로 느끼며 연주자와 같은 공간 안의 공기의 울림을 고막에 전달받은 지역 교향악단 연주가 훨씬 감동적이다. 가성비 좋은 구독경제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그럴수록 넘쳐나는 디지털 콘텐츠 사이에서 아날로그의 존재감은 더 빛을 발한다.

저작권자 © 충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충청신문기사 더보기

하단영역

매체정보

  • 대전광역시 중구 동서대로 1337(용두동, 서현빌딩 7층)
  • 대표전화 : 042) 252-0100
  • 팩스 : 042) 533-7473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황천규
  • 법인명 : 충청신문
  • 제호 : 충청신문
  • 등록번호 : 대전 가 00006
  • 등록일 : 2005-08-23
  • 발행·편집인 : 이경주
  • 사장 : 김충헌
  • 「열린보도원칙」충청신문은 독자와 취재원 등 뉴스이용자의 권리 보장을 위해 반론이나 정정보도, 추후보도를 요청할 수 있는 창구를 열어두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고충처리인 : 노경래 (042-255-2580 / nogol69@dailycc.net)
  • Copyright © 2024 충청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dailycc@dailycc.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