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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속으로] 그믐날을 보내는 방법

강희진 음성예총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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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19.12.30 00:09
  • 기자명 By. 충청신문
강희진 음성예총 부회장
강희진 음성예총 부회장
한해의 끝자락을 또 이렇게 맞는다. 년 말이 되면 아쉬운 마음과 쓸쓸함이 공존하고 그러면서도 설렘으로 내년을 기대하는 양가감정을 느끼고는 한다. 아이들 어렸을 때는 12월 31일 밤에 년말가족파티를 열었다. 한 해 동안 열심히 공부했다고 격려하는 의미로 엄마아빠 이름으로 상도 만들어주고 새해 덕담도 미리 나누며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먹으며 제야의 종소리를 들었다. 이것은 친정집에서 ‘묵은세배’라는 이름으로 섣달그믐날에 할머니에게 절을 드리던 일이 생각나서 시작 해 본 일이다. 양력이기는 하지만 1년의 마지막 날을 가족과 함께 한다는 것에 의미를 두고 오랫동안 해온 연례행사였다. 이제 아이들은 성인이 되어 대처로 나가고 가족 카카오 톡으로 인사를 하며 각자 바쁜 자신들만의 일상을 보내니 함께 보낼 일은 점점 줄어 들고 있다.

하는 일이 같고 년 배도 비슷한 후배들과 1년 강의를 마무리 하면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는 철지난 광고카피를 외치며 여행을 간다. 벌써 4년째다. 열심히 일 년 살았고 아이들에게도 아낌없는 뒷바라지를 했으니 괜찮다고 혼자만 떠나는 나에게 면죄부를 주고 홀로 남은 남편 쪽으로는 살짝 눈을 감아버린다.

나에게도 늘 다사다난 했던 한해를 뒤돌아보는 일은 여행지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기록으로 남기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는 새해를 계획한다. 여행이라는 것은 일상에서 벗어나는 일이기에 내 울타리를 벗어나 뒤돌아보면 내 자신이 좀 더 잘 보이고 내가 했던 일들도 객관적으로 판단되기도 한다.

그런데 요즘 한 가지 발견한 것이 있다. 금을 긋는 일이 잘되지 않는다. “네가 나에게 이만큼 주었으니 나도 이만큼만 하겠다. 이 분노가 사라질 때까지 당분간은 상대하지 않겠다.” 등 이런 일련의 격정적인 감정이 언제부터인가 사라져간다. 예전에는 이런 사람을 보면 밸도 없다고 분개 했었는데 지금의 내 모습이다.

이건 세월이 내게 주는 상이다. 이런 상은 사양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요즘은 무슨 일이 생겨도 신경이 조금 무뎌지고, 남이나 나에게 너그러워지며, 어떤 일을 당해도 기다릴 줄 아는 마음이 생겼다. 또한 뾰족한 직선으로만 내 닫던 마음이 곡선이 되기도 하고 애가 타도 멀리서 바라볼 줄도 알게 되었으니 늙어 간다는 것을 속상해 하지만 말아야겠다.

아마 이 글이 신문지면에 게재되는 날 나는 이탈리아의 두오모 성당의 종탑 앞에 서서 돔을 설계한 블루넬레스키의 위대함에 빠져 예술의 힘을 극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도 아니면 브레라 미술관에서 위대한 미술작품에 빠져 스탕달 신드롬을 경험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한해의 마지막 날을 늘 보고 싶었던 건축물과 예술가들의 작품을 보며 보내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이것도 치열하게 살아온 대가의 여유이니 마음 편히 즐기리라.

근래 몇 년 전부터 년 말이 되면 김남조 시인의 “섣달 그믐날”을 조용히 음미해 본다. 어찌 이리 내 마음 같은지 시인도 이 시를 쓸 당시의 나이가 지금 내 나이쯤이지 않았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도 해 보면서…….

새해 와서 앉으라고/ 의자를 비워주고 떠나는/ 허리 아픈 섣달 그믐날을 /당신이라 부르련다/ 제야의 고갯마루에서/ 당신이 가물가물 사라져가는 길/ 뚫어서 구멍 내는 눈짓으로/ 나는 바라봐야겠어/ 세상은/ 새해맞이 흥분으로 출렁이는데/ 당신은 눈 침침, 귀도 멍멍하니/ 나와 잘 어울리는/ 내 사랑 어찌 아니겠는가/ 마지막이란/ 심오한 사상이다/ 누구라도 그의 생의/ 섣달 그믐날을 향해 달려가거늘/ 이야말로/평등의 완성이다/ 조금 남은 시간을/ 시금처럼 귀하게 나누어주고/ 여윈 몸 훠이훠이 가고 있는 당신은/ 가장 정직한 청빈이다/ 하여 나는 / 가난한 예배를 바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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