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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속으로] 착각

이혜숙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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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20.01.13 14:29
  • 기자명 By. 충청신문
이혜숙 수필가
이혜숙 수필가
70대 어른이 운전 중 행인을 치어 사상자를 났다는 뉴스가 들리더니 종종 나이 드신 분들의 낸 교통사고 소식이다. 70을 넘긴 운전자의 교통사고에 민감하게 걱정하는 소리가 분분하다. 면허증을 반납해야 한다고 한다.

면사무소 안에 실버들이 운영하는 커피숍이 있다. 내 또래들인데 실버 일자리를 위한 곳이란다. 60대 중반이면 노인이라고 한다. 나는 아직도 청춘인 것 같은데 나도 모르는 사이 노인대열에 끼여 있다는 것이 이상하다.

살면서 내가 나이 들었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는 것 같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럴 것이다. 청춘은 아니라도 젊음으로 세상을 당당하게 살아간다고 생각했다. 아플 때만 ‘나이 들어가나 보다.’ 라고 잠간 생각했을 뿐이다.

수년 째 병원과 친하게 지내고 있다. 대학병원 몇 곳을 다녀도 진전이 없다. 양방의 힘을 빌렸는데 한방의 힘도 같이 빌려보기로 했다. 지나긴 시간을 힘들게 지나온 터라 예약을 하고 병원에 가는 길이다.

미리 서울로 올라와 딸의 집에서 자고 아침을 먹고 운동도 할 겸 지하철역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조금 피곤하면 아픈 곳이 더 심해져서 운동도 쉬었기에 이참에 좀 걸어볼까 하는 마음이었다.

든든하게 아침을 먹고 나선 길인데 다리가 후들거린다. 힘이 빠지는 게 이상하다는 생각을 한다. 건널목이 대여섯 발자국 남았는데 파란 신호등이 들어온다. 쫓길 시간도 아닌데 파란 신호등을 보자 달리기 시작했다. 두어 걸음 뛰었을까. 길 위에 멋지게 널브러지면서 손바닥이 긁혀서 피가 나고 욱신거렸다.

천천히 일어나 이곳저곳을 살폈다. 옛날 같으면 창피해서 얼른 일어나 누가 볼까 두리번거렸을 텐데 나이가 들어서인지 얼굴에 철판이 깔렸는지 아픈 곳부터 살펴진다. 한참을 걷다보니 다리도 아팠다. 바지를 걷어보니 구멍이 보일만큼 파이고 피가 흥건히 흘러 바지를 적셨다. 뛸 이유도 없는데 순간적으로 뛴 이유는 나도 모르겠다.

병원 가까이 가서 약을 사서 바르고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위로해 주겠지 하고 주저리주저리 설명했더니 대뜸 한다는 소리가 조심 좀 하란다. 평소 급한 성질을 아는 터라 또 성질대로 걸었을 거라면서 핀잔이다. 나는 무조건 많이 다쳤느냐 약을 발랐느냐 걱정할 줄 알았다. 의리 없는 남편 같으니라고 아픈 것 보다 더 기분이 나빴다.

딸에게도 전화를 했다. 괜찮냐고 묻더니 엄마가 청춘이냐며 천천히 다니고 옛날 생각 말고 조심하라며 위로해준다. 딸은 나이 들면 친구가 된다더니 딸이 훨씬 더 낫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빙판이 미끄러워도 가뿐히 일어섰는데 대낮에 멀쩡한 길 위에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빙판에서 미끄러져도 넘어지지 않고 가뿐히 일어섰는데 대낮에 멀쩡한 길 위에서 멋진 슬라이딩으로 넘어졌으니 나이가 들긴 들었나 보다. 청춘이라고 소리친 내가 부끄러워지는 순간이다.

키가 작아 하이힐을 신고 다녔었다. 인공디스크 삽입 수술을 하고 낮은 구두를 신었는데 가끔은 하이힐을 신는다. 하이힐을 신으면 젊음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다. 그렇다고 키가 커지진 않지만 나름 폼을 잡고 싶었어져서다. 이번에 대로변에서 슬라이딩을 하고서야 부질없는 생각임을 절실히 느꼈다.

돋보기를 써야 책을 볼 수 있는 노안이 왔는데도 인정하지 않는 나. 한 곳 두 곳 아픈 곳이 늙어나 병원을 전전하면서도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다니며 아직은 젊다고 소리친다. 착각이라도 마음이나마 젊을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싶어서다.

자신의 나이가 많아진다는 것은 누구나 부정하고 싶을 것이다. 귀촌하면서 혼자서 억척스레 집을 꾸미고 나무를 심고 손에 익지도 않은 작물을 심으면서 용감하게 살았다. 낯선 곳 그것도 외딴집에 살아도 겁날게 없었다. 올케들은 무서워서 어떻게 사느냐고 걱정하면서 자기들은 무서워서 절대 못 살 것 같다고 했다.

그럴 때마다 내가 누군데 아직은 젊어서 괜찮다고 큰소리를 쳤다. 지금도 무서울 것은 없는데 일할 때 기운이 딸린다. 밭일을 하다가 힘들면 그냥 밭에 드러누워 일손을 멈추기 일쑤다. 이게 바로 늙어가는 징조인가 보다.

요양원 봉사가면 어르신들이 더 늙지 말고 그 모습 그대로 예쁘게 있으라고 한다. 나를 아직 젊은이로 보는 저 분들을 위해 노래 부르는 시간만큼은 아이가 되어 부모님 앞에서 재롱잔치를 하는 것 같다.

착각이라도 내 세상이 아름다워 진다면 이쯤 허세야 어떠랴. 새해에도 더 예쁜 착각으로 살아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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