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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사월, 생의 기쁨을 얻게 하는 달

신미선 음성수필문학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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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20.04.07 14:00
  • 기자명 By. 충청신문
신미선 음성수필문학회 사무국장
신미선 음성수필문학회 사무국장
주말 아침 베란다에 앉아 신문지를 깔고 화분 몇 개에 씨앗을 심었다. 모름지기 나무를 심어야 한다는 식목일이건만 코로나19로 외출이 망설여지는 시기인지라 올해는 약식으로 집에서 간소하게 상추를 심어보기로 했다. 화분 가득 흙을 돋우고 씨를 심고 물을 주며 햇볕이 가장 잘 드는 양지에 자리도 잡아주었다. 아마도 며칠 후면 갈색 토양을 힘차게 뚫고 연둣빛 새싹이 쏙쏙 돋아날 것이다.

어느 해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이지 싶다.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던 중 길가에 나뭇가지 하나가 나뒹굴고 있었다. 어린 마음에도 작은 가지 하나라도 허투루 대하는 일이 없는 아버지가 생각나 손에 쥐고 집으로 돌아왔다. 마침 마당에서 화단의 흙을 고르고 계시던 아버지가 보시더니 “개나리 가지로구나.” 하며 마당 뒤 켠 등성이에 심어주셨다. 그 가지 하나가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며 점차 가지를 늘여 동네에선 우리집을 ‘개나리집’이라 불렀다.

나무를 좋아하셨던 아버지는 매년 한식(寒食)날을 전후해 나무를 심었다. 어느 해에는 뜰 안 대문 옆에 대추나무를 심고 또 어느 해에는 뒤란 햇볕이 지나는 등성이에 자두나무와 감나무를 심었다. 내가 초등학교를 들어가던 해, 아버진 그날을 기념해 초록 대문 양쪽 옆으로 포도나무를 심기도 하셨다. 포도나무는 봄부터 초록잎을 달기 시작해 여름을 지나면서 대문 중앙에서 만나 열매를 달기 시작했다. 손수 진흙을 발라 쌓아 올린 담벼락 밑에는 붉은 장미 넝쿨도 올렸다. 겨우내 죽은 듯 그 모습이 초췌한 잎과 앙상한 줄기는 신기하게도 해마다 봄이면 물이 오르고 생기를 되찾았다.

아버지의 식목(植木)은 동네 사람들에게까지 전이가 되었다. 집집마다 한두 그루씩 나무를 가꿨다. 봄이 오고 사월이 되면 온 동네 과실수들이 꽃을 피워 멀리서 보면 온통 분홍빛이었다. 특히 옆집에는 복숭아나무가 한 그루 번듯하게 서서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우리 집을 향해 가지를 뻗었는데 덕분에 꽃그늘이 두 집으로 번져 봄철 내내 마당이 화사했다. 봄바람을 타고 꽃잎이 흩날리면 나도 덩달아 천방지축 함께 뛰어다녔고, 비라도 내려 꽃잎이 떨어지는 날에는 나뭇가지 사이로 우산을 씌워 주려 애쓰던 날도 있었다. 철마다 열두 폭 화첩을 펼쳐놓은 듯 그림 같던 나의 옛집. 햇살이 깊은 날이면 엄마는 나무에 줄을 엮어 빨래를 널고 나는 그 그늘 아래에서 숨바꼭질을 하며 놀았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나의 옛집이 많이 떠오른다. 내 고향 앞마당에는 여전히 개나리가 노란 물결을 이루고 있을 것이고, 옆집의 오래된 복숭아나무는 길게 가지를 뻗어 우리 집 뜰 안으로 또다시 꽃잎을 흩날릴 것이다. 철마다 온갖 꽃과 나무로 가득해 따로 나들이를 나가지 않아도 마당에 돗자리 하나만 펼치면 바로 소풍이 시작되던 곳. 꽃과 나무를 즐겨 심던 아버지는 이제 기력이 쇠하고 노환이 깊어 더는 그 일을 할 수 없게 되었지만, 당신께서 심어놓은 나무 그늘 밑에서 나의 유년은 더없이 풍성했고 충분히 아름다웠다.

일찍이 이양하 선생이 쓴 그의 수필 「나무」에서는 “나무는 훌륭한 견인주의자(堅忍主義者)요, 고독의 철인(哲人)이요, 안분지족(安分知足)의 현인(賢人)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늘 책을 가까이하셨던 아버지는 나무를 심으며 선생의 수필을 염두에 두었을지도 모른다. 나무를 심을 때 흙을 돋운다던가, 물을 준다던가, 하는 소소한 작업을 자식들과 함께했다. 철이 들고 어른이 되고 집 밖으로 나가보니 그 시절 함께 했던 시간이 가장 배움이 깊었던 시절 같다. 세상 어느 곳에 던져 놓아도 견인의 삶을 살 줄 알아야 하며 혼자 있을 수 있는 사람이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진리를 당신께선 나무를 심으며 몸소 가르치셨다.

사월이다. 인디언들의 달력에 사월은 머리맡에 씨앗을 두고 자는 달, 큰 잎사귀가 인사하는 달, 만물이 생명을 얻는 달, 생의 기쁨을 느끼게 하는 달이라고 한다. 식목일은 지났지만 무엇을 심어도 잘 자랄 때이니 나무 한 그루, 작은 꽃 한 송이라도 심어보는 사월 한 달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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